매일신문

희망편지-등급 노이로제

뒤늦게 핀 봄꽃들이 자태를 한창 뿜어낸 지난 일요일. 우연히 지나던 시골 장터에서 먹음직스런 토마토가 눈에 들어 발길을 멈췄다. 크기와 익은 정도 등에 따라 나눈 듯 상자마다 특등급, 1등급, 2등급으로 표시돼 각기 다른 값에 팔리고 있었다. 재배농인 듯한 판매상에게 "모두 특등급 될 때까지 키웠다가 팔면 안 됩니까?"라고 물었더니 "할 수만 있으면야 그게 좋죠"라며 너털웃음을 쏟아냈다.

"농사라는 게 그래요. 똑같이 공을 들여도 굵고 잘 익은 놈 있고, 작고 덜 익은 놈 있죠. 마음이야 모두 특등을 주고 싶지만 사는 사람 속일 수는 없으니…."

내친김이라는 듯 그는 추곡수매 이야기를 꺼냈다. "쌀가마에 등급 도장이 찍힐 때 기분은 말로 못 하죠. 일 년 내내 피땀을 부은 쌀이 낮은 등급을 받으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올해부터 추곡수매가 없어진다니 좀 덜할까 싶지만, 등급은 어떻게든 남아있을 겁니다." 일 년 농사를 한 번의 평가, 그것도 등급 도장 하나로 평가받는 농민들의 스트레스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런데 올해 고교 1학년생들부터는 농민들 못지않은 등급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2008학년도 대학입시 관련 내용이랍시고 발표하는 양을 보면 스트레스의 정도가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교육부는 이미 수능시험을 1~9등급까지 완전 등급제로 바꾸기로 확정한 상태다. 일 년 공부, 아니 초등학교부터 12년 동안의 공부가 한 번의 시험에서 1, 2점 차이로 다른 등급으로 평가받는 현실을 학생들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지난 해 수능처럼 난이도 조정이 잘못돼 한 문제를 틀렸는데 3등급을 받게 된다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서울대는 이미 수능시험 등급을 지원의 최저 자격 기준으로 활용한다고 밝혔다.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방침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수능시험 단 한 문제를 더 틀리는 바람에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지원조차 못 하는 억울한 수험생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가 고교에 보낸 내신 성적 처리 지침은 한 술 더 떠서 학생들에게 등급 노이로제를 불러올 정도다. 동점자가 많을 경우 동점자 전원의 중간 석차를 내 그 백분율로 등급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만점자가 많으면 100점을 맞아도 2등급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셈이다.

내신 부풀리기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학교 시험을 치를 때마다 자신의 실력뿐만 아니라 시험 난이도와 다른 학생들의 성적까지 걱정해야 한다는 것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렇게 받는 수능과 내신 등급이 대학 합격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학들이 변별력 낮은 수능과 내신 성적 대신 대학별 고사를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08학년도 대입 수험생들은 이제 추곡수매를 하는 농민들보다 훨씬 고단한 생활을 해야 할 형편이다.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내내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물론 등급 판정을 받은 뒤에도 이리 찔러 보고, 저리 뒤집어 보는 대학들의 손길을 감당해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고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입시 과열이 수그러든다고 교육부가 떠들어대니, 항변도 변변히 못한 채 말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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