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잊혀진 곳 숨은 이야기)구룡포 '종로거리'

"기생 10여 명을 둔 고급 술집만도 10여 군데에 이르렀죠. 고등어 등 고기가 많이 잡히던 가을철에는 일본 보따리 장사꾼들이 엄청 몰려와 한달 동안 밤새 야시장을 여는 등 대단했지요."

70년대까지만 해도 구룡포는 명실상부 동해안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구룡포에 일제강점기 경북 동해안 최대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적산가옥(敵産家屋)과 골목길은 시간을 해방 전으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할 만큼 보존 상태도 좋다.

'종로가(鐘路街)' '종로 거리' 또는 '선창가'등으로 불리던 이곳 일본인 집단주거지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배홍대(83) 옹은 "서울 '종로거리'에서 따온 것인지 포항의 일본인 집단 주거지를 '불종거리'라 부른데서 온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 구룡포에는 일본인들이 참 많았다"고 회고했다.

배 옹이 기억하는 일본인 집단 거주시기는 대략 1920년대 초. 1922, 23년쯤 구룡포 방파제 1차 공사가 끝나고 어항이 제 구실을 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들어와 구룡포 사람들이 많이 살던 '큰 동네', 즉 지금의 구룡포 6리 언덕배기(구룡포공원 동쪽) 밑 해안가를 매립해 집을 짓고 길을 냈다는 것. 일본인 자녀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닌 '창주공립보통학교' 대신 '구룡포 심상소학교'에 다녔다.

지금의 구룡포공원 동쪽 편에서 시작, 서북쪽의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약 1km에 걸쳐 형성된 종로거리의 골목길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집들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탓에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10여 채에 불과하다. 나머지 30여 채도 일본식 가옥임은 금방 알 수 있지만 중간에 수리를 여러 차례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몇년 전 방영된 모 방송국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 촬영지가 된 '종로거리'는 구룡포를 자주 찾는 외지인들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마음먹고 나선다면 몰라도 구룡포 읍내 중심도로 뒤편에 있어 중심도로를 따라 대보 호미곶으로 가는 관광객들은 지나치기 일쑤다.

향토사가인 황인(동해정보여고 교사)씨는 "종로거리는 구룡포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구룡포가 동해안 굴지의 어업전진 기지가 된 것은 일본인들의 구룡포 점령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만큼 역사적 교육 현장이자 또다른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구룡포에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이주해 왔을까. 영일군청이 포항시와 통합하기 전인 1990년에 발행한 '영일군사'에는 1933년 구룡포(당시 창주면)에는 1천123명(275가구)이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당시 포항읍(포항면에서 1931년 읍으로 승격)의 2천563명(605가구)에 이어 영일군에서 두번째로 많은 것. 포항읍의 경우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중앙·동빈동 일대 선창가를 당시 '불종거리'라고 불렀다.

구룡포 일본인들은 큰 배로 직접 고기를 잡거나 배와 관련한 업종, 식당이나 술집, 옷가게 등에 종사하며 살았다. 또 우리나라 사람보다 경제력이 뛰어나 일본인 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구룡포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던 배 옹은 "기생을 둔 고급 술집 10여 곳도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다"며 "때문에 경북 도내에서 고액납세자가 많기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찰도 종종 빚었다. 술집에서 말다툼 끝에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숨지기도 했다.

배 옹은 "흥분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거리에 보이는 일본인들을 보이는 대로 몽둥이로 때려 일본인들이 방파제에 매어 놓은 선박으로 피신하는 큰 사건이었다"며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당시 아사히(朝日)신문 구룡포지국장의 중재로 양쪽이 화해했다"고 술회했다.

한편 구룡포 종로거리에 살던 일본인들은 해방과 함께 모두 구룡포를 떠났다. 그후 적산가옥은 일본인 직장의 종업원 등이 이어받았고 영욕(榮辱)의 역사도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포항·임성남기자 snli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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