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절대 권력 바티칸 제국

루트비히 링 아이펠 지음/ 열대림 펴냄

1870년 9월 20일, 1천년이 넘게 교황의 권력을 지탱해 온 교회국가가 종말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신생 이탈리아 군대는 '최후의 보루'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곳곳의 세속 영토를 빼앗긴 채 죄수처럼 0.44㎢의 바티칸시국에 갇혔다. 교황이 자신의 왕국없이 오로지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2억명의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충격과 불안감에 휩싸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불과 95년이 흐른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뉴욕 유엔 총회 연설에서 세속의 권력을 잃게 된 이 사건을 두고 '고마운 신의 섭리'라고 평가했다. 거듭된 전쟁과 갈등으로 평화를 잃어버린 인류가 종교적 신념을 무기로 평화를 외치는 가톨릭의 수장에게 구원을 청했기 때문. 힘과 명예를 잃었던 베드로의 성좌는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 정치의 중심부로 우뚝 섰다. 현재 교황청은 교황과 국무원을 정점으로 2천800개 주교구와 22만개 교구, 10만개 사회시설, 수만개 학교, 수백개 신문'방송을 거느린 절대권력이다.

'세계의 절대권력 바티칸 제국'은 몰락의 위기에 처했던 가톨릭 교황이 불과 1세기 만에 어떻게 국제 정치의 정점에 서게 됐는지를 파헤친 책이다. '바티칸 전문가'로 평가받는 루트비히 링 아이펠은 오랜 기간 독일 언론의 로마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자 지상의 절대 권력인 바티칸이 걸어온 도약의 역사와 실체를 생동감있게 그려낸다.

세계 정치에 대한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새삼 확인했던 사건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바그다드 공격을 인정받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교황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경고했으며 소리 높여 평화를 기원했다. 대중매체와 정치권의 반응은 놀라웠다. 교황에게 비판적인 언론조차 '백발의 신관'이 보내는 평화의 호소에 열광했다. 전쟁 반대론자와 찬성론자 모든 진영의 세계지도자들은 교황을 최후의 구원자로 여기며 바티칸을 방문했다.

1978년 10월16일 폴란드 출신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야가 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됐을 때는 심지어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그의 선출은 폴란드 출신 필라델피아 추기경 존 크롤과 폴란드 출신의 카터 행정부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동구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시나리오였다는 것. 이 음모론을 증명이나 하듯,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권'을 부르짖으며 폴란드 자유노조의 불을 당겼고 이 일을 계기로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자유를 향한 불길은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옮겨 붙었다.

뿐만 아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거쳐가면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는 '인권'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에게 폭력없는 전쟁을 선포했다. 1981년 2월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 2년 뒤 마르코스 정권은 붕괴됐고 이런 현상은 칠레, 브라질, 파라과이, 아이티, 니카라과 등에서도 재현됐다.

이 책은 19세기 말부터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땅에 떨어졌던 교황의 권위가 세계사의 진행 과정에서 어떻게 정점을 향해 가는 지를 상세히 묘사한다. 레오 13세(1878~1903)는 1891년 교회가 귀족과 착취계급의 동맹이 아니며 노동자의 적법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새로운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비오 10세(1903~1914)는 비외교적 성격으로 가톨릭교회에 필수적인 폐쇄성을 부여했고, 베네딕토 15세(1914~1922)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적극적인 화해노력으로 바티칸의 위상을 높였다. 비오 11세(1922~1939)는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맺어 바티칸을 '국가'로 만든다. 하지만 무솔리니를 '하느님의 섭리가 내린 인간'으로 명명하면서 비판 받기도 했다. 비오 12세(1939~1958)는 가톨릭교회의 보호를 이유로 나치와의 대립을 피함으로써 유대인 학살을 묵인했다는 원성을 샀다.

냉전 이후 요한 23세(1958~1963)는 1963년 전후 냉전시대 양 진영 모두와 대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바오로 6세(1963~1978)는 처음으로 유엔을 무대로 세계평화를 호소했다. 책 곳곳에는 교황의 환심을 얻기 위해 미'소 양 진영이 벌이는 외교전,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스파이로 바티칸에 잠입했던 신부, 바티칸은행을 둘러싼 스캔들 등이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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