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경제의 주축은 중소업체다. 건설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중소업체 대다수는 하청업체들이지만 업체 사장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제조업은 수십 년 뒤틀린 원하청 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채 아직껏 신음하고 있고, 건설업에 종사하는 하도급업체도 최근 대구 주택·건설 시장을 장악한 대기업은 물론 지역 일반 건설업체들로부터도 일감을 받지 못해 회사 문을 닫을 지경이다. 벼랑끝 위기로 내몰려 신음하는 지역 하청업체의 비애를 현장확인했다.
◇법보다 무서운 '괘씸죄'
대구의 900여 전문 건설업체는 외환위기 후 지역 주요 주택건설업체들의 연쇄 부도로 일감이 확 줄은데다 최근에는 외지 대기업에게도 '찬밥 신세'를 당하고 있다. 겨우 일감을 받아 공사를 해도 원사업체들이 일한 대가를 잘라 주거나 제때 주지 않아도 '반항'은 있을 수 없다. 지난 20일 대구시내 한 음식점. 대구에서 20, 30년 이상 전문 건설업체를 운영해온 50, 60대 사장 5명의 '한풀이'는 끝이 없었다.
"30년 을(하청)의 설움은 안당해본 사람은 몰라. 속이 숯검댕이 됐어."(ㅅ사장) "법에도 없는 가장 큰 죄가 바로 괘씸죄야. 업계에서 괘씸죄에 한 번 걸리면 발붙일 수 없어."(ㄱ사장) "원사업체는 뒷간에 앉아 우리를 개부리듯 해. 우리가 무슨 사장이야. 원사업체 말단 직원보다 못한 인생이지."(ㅇ사장)
사장들은 원사업체의 권력은 외환위기 이후 더욱 세졌다고 했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잘리면' 다른 일감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딴판이라는 것.
"경기는 불황인데, 하도급 업체는 많고…별 수 있어.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공사를 따야 해. 그래서 업계에선 '일하고도 코피난다'고들 해."
사장들은 건설현장의 30대 대리를 '할배'라고 칭했다. 모멸감을 느껴도 몸을 낮춰야 한다는 것. 언제 어디든 호출할 경우 하던 일도 멈추고 달려가야 한다. '괘씸죄'에 걸리기 않기 위해서다."옛날보다는 많이 사라졌지만 없는 살림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선 '정성'도 표시해야 돼."
이들 중 한 사장은 최근 원사업체 직원들의 저녁 회식비로 100만 원을 썼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사장은 모 기업 간부의 개인공사를 해주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공사 후 대금 청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금을 받게 되면 찍히기 때문에 다음 공사의 '보험용'이라는 것.
또 사장들은 현장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산재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했다. 산재로 처리하면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는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 사장들은 "산재가 발생하면 하도급 업체들이 목돈을 들여 조용히 처리한다"며 "이를 어긴 업체는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찬밥신세
하도급 업체 사장들은 최근에는 외지 대기업들에게도 설움을 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구의 아파트 공사 현장은 지난해부터 외지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대구의 하도급 업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
전문건설협회 대구시회 강수일 사무처장은 "외지 대기업들은 자본력이 약하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기술이 부족하다, 공사실적이 적다는 등의 이유로 서울·수도권의 협력업체만 챙길 뿐 지역에는 문을 닫아버린다"고 했다.
대구의 한 철근콘크리트 전문업체 사장은 "대기업들이 1년에 한 번씩 협력업체 등록을 받지만 3년간 공사실적을 요구해 공사 기회조차 별로 없는 지역업체는 서울 등의 업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겨우 실적을 갖추면 대기업 간부 추천을 요구, 결국 지역업체가 발붙이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시회가 지난해 말까지 대구시내 주요 외지 대기업의 건설 현장을 상대로 하도급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일건설(매호 한일유엔아이)은 지역업체에 아예 하청을 주지 않았고, 건영(다사 건영캐스빌)도 19개 외지 업체에 일을 줬지만 대구는 단 2곳뿐이었다.
한화건설(신당동 꿈에그린), 코오롱건설(범어동 하늘채), 대림산업(수성동 e편한세상) 등도 지역 대 외지업체의 하도급 수가 각각 2대 27, 1대 27, 2대 20 등으로 지역 업체를 차별했다.
또 공사 금액 대비, SK건설(반월당 허브스카이)은 외지업체는 88%를 준 반면 지역업체는 고작 12%에 그쳤고, 동양메이저(수성동 동양아파트), 대우자동차판매(진천 이안), 경남기업(대봉동 센트로팰리스) 등도 지역 업체에 각각 19%, 21%, 23%만 줬을 뿐이다.
좁은 문을 통과해 협력업체에 등록해도 지역업체는 여전히 '왕따'다. 대구의 한 전문업체는 지난해 어렵게 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등록했다. 공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곧 실망으로 변했다. 입찰에 참여하라는 연락 한 번 받지 못했으며 공사마다 서울·수도권의 업체들이 공사를 독식해 버린 것. 사장은 "알고 보니 '들러리'"라고 분개했다.
시회의 2003년 말 기준 지역 업체가 외지 대기업과 맺은 하도급 공사 계약 현황에 따르면 롯데건설은 28개 중 14개, 삼성물산은 17개 중 8개, 대우건설은 19개 중 8개, 코오롱건설은 17개 중 5개의 지역 협력업체가 한 건의 계약도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소 업체 역시
하도급 업체 사장들은 "일부 중소 일반 건설업체들은 대금을 잘라먹거나 제때 주지 않는 등의 횡포가 여전하다"며 "그러나 수직 관계상 불공정 행위를 신고하기도 어려운데다 신고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도급법은 건설업 하도급 거래 성립 요건의 경우 연매출액이 30억 원 이상인 원사업자, 연매출액 또는 상시 고용 종업원 수가 하수급자(하도급자)의 2배를 초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회에 따르면 대구의 2004년 말 기준 실적신고 일반건설업체 177개 중 절반 정도인 87개 업체만 30억 원 이상에 해당된다는 것.
시회는 "매출액 30억 원 미만의 소규모 원사업자들의 불법행위가 더 많아 우선적으로 하도급법의 적용을 받아야 할 업체들이 오히려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모순점이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시회는 지난해 공정위의 하도급 불공정거래 순회 상담에서 상담업체의 30~40%나 요건 미달로 상담이 이뤄지지 않아 원사업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대구지방공정거래사무소 관계자는 "우월적 지위의 기준을 연간 매출액 30억 원 이상의 일반건설업체로 본 것"이며 "대구는 불공정행위를 당해도 신고를 하지 않는 하도급 업체들의 관행이 더 문제"라고 했다.
기획탐사팀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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