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노(魯)나라 사람 미생(尾生)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어느 날 다리 아래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하지만 홍수 때문에 갑자기 물이 크게 불어 약속한 곳에서 기다리기 어렵게 됐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애인마저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은 그런 급박하고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려 최선을 다했다. 물이 더 불어도 애인을 기다리며 다리 기둥을 부둥켜안고 버티었다. 그러나 사면초가(四面楚歌),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일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신의(信義)를 이야기할 때 이 고사를 인유(引喩)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 평가는 당연히 엇갈리게 마련이었다. 당시 소진(蘇秦)은 미생을 '신의가 두터운 사나이의 본보기'로 꼽았다. 장자(莊子)는 달랐다. '쓸데없는 명목에 사로잡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른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미생지신'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 같다. 약속을 저버리기만 할 뿐 아니라, 저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마저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르쇠'이기 십상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그 '대표 선수' 격이라 할 수 있다. 번드르르한 '말의 성찬'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미생은 골치 아픈 인물 아니면, 바보가 돼버리는 세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는 30일의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 다시 도처에 말의 성찬이 넘쳐난다. 지도층 인사들은 진정으로 민생을 살피려 하기라도 하는 건지, 패거리 짓기나 줄 서기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국민 역시 개인이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선거 바람몰이가 또다시 한창이다. 일부 지역 선거를 겨냥해 서로 상처와 흠집 내기, 현실성이 희박한 공약 남발, 당리당략과 불신감의 팽배 등으로 어지럽기 그지없다.
한 철학자는 "정치가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휘두르며 남을 지배하는 데 있다"면서, 정치가를 "도적이 아니면 사기꾼"이라고까지 깎아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 사회, 한 국가의 독립과 번영, 존속을 위해서라도 정치는 필요하며, 어떤 작업보다도 어렵고 개인적인 희생을 요구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우리의 정치 풍토는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 위주의 패거리 짓기, 지역 이기주의나 집권 야욕이 애국심보다 앞서 온 게 사실이다. 커다란 풍선 같던 공약(公約)은 정치적 목적만 이뤄지면 곧바로 물거품처럼 공약(空約)이 돼버리곤 했다.
선거철은 철새 떼의 대이동 시기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소용돌이가 거듭돼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다. 여전히 그 사정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정치적 신조나 국민을 위한 헌신의 자세보다는 야망에 불 지피거나 이해(利害)를 따라 움직이는 행렬이 길어지고 있지만, 자신도 그 대열에 끼어 있지 않은지도 자성해 봐야 한다.
영천(永川) 국회의원 재선 현장만도 '총성 없는 전장'에 진배없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구·경북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여당의 공세, 이에 맞서 낙동강 전선 사수에 나선 야당의 대응은 가히 처절할 정도다.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해 요동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려'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철학자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이런 때에 "모든 국민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정치가의 가면을 쓰고 설치는 깡패나 사기꾼의 벌거벗은 꼴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물론 선택의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속고 속이는 세상, 그러고도 또 속는 세상은 아니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말의 성찬이나 공약(空約)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경계돼야만 한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은 그 피해가 부메랑처럼 어김없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 미생(尾生)과 같은 '위인'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바보'로 보이지 않는 사회는 안개 저편에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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