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동해안의 구룡포항은 고래로 유명하다.
하지만 고래잡이가 아니라 고래고기로 더 이름을 떨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원래 동해안의 고래 주서식지는 먹이인 멸치와 새우, 고등어, 곤쟁이 등이 많은 울진-감포-울릉도 연근해를 잇는 해역. 인근 항구 중에선 포항 구룡포와 울산 장생포가 주요 포경기지였다.
포경선 수나 규모만 따진다면 구룡포는 장생포보다 훨씬 적었다.
포경 전성시대였던 80년대 초 장생포 선적은 90t급 철선이 10여 척에 달했으나 구룡포 선적은 40t급 목선 3척에 불과했다.
더욱이 소나(수중청음기)가 설치된 철선은 하루 최고 7, 8마리의 고래를 포획했으나 목선은 겨우 연간 20여 마리를 잡을 만큼 영세했다.
하지만 고래고기 시장은 구룡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포경선에는 냉동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고래를 잡은 후 거리가 먼 장생포까지 가다 보면 고기가 부패하는 경우가 많아 울산 선적 포경선 대부분이 가까운 구룡포로 향했던 것.
자연스럽게 동해안 최대의 고래고기 시장이 된 구룡포항에선 이제는 없어진 수협 위판장 부지에서 고래를 해체했고 전국의 상인들이 대규모로 고래고기를 구입해 갔다.
부두 곳곳에는 고래 부위별로 삶은 고기나 생고기를 썰어 파는 좌판 상인들도 즐비했다.
구룡포 토박이 김영식(55·매일신문 구룡포지국장)씨는 "30여 년 전 고래를 잡은 포경선이 귀항할 때 울리던 뱃고동과 사이렌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뱃고동이 울리면 사람들이 부두로 몰려가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졌다"고 기억했다.
구룡포에는 고래잡이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1940년대부터 길이 12m짜리 목선을 타고 40여 년간 포수로 일했던 윤병두(89·삼정2리)옹은 "고래를 잡은 날은 부두에서 술판이 크게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포수란 고래잡이 배 선두(船頭)에 설치된 화약을 장전한 작살을 쏴 고래를 맞추는 사람. 당시 목선(승선원 8명)에서는 포수가 항로와 고래 발견 때 운항 속도, 포획 등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했다.
그래서 포수는 구룡포에서 매우 인기 있는 직업이었고, 돈 많은 선주들은 우수한 포수를 확보하기 위해 매우 고심했다고 한다.
윤옹은 "목선의 40마력짜리 작은 엔진에서 나오는 '통통통' 소리를 고래들이 매우 좋아했다"며 "운항 중 배 밑을 몇 차례 오가던 고래가 배 옆으로 붙는 순간 작살을 발사한다"고 말했다.
당시 고래가죽에서 나오는 기름(비누나 로션의 원료)은 좋은 부수입이었다.
7m짜리 밍크고래에서는 불을 지핀 솥에서 찌면 40드럼, 보일러로 찌면 60드럼이 생산됐다고 했다.
윤옹은 "동네 아낙네들이 머릿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래 기름을 부탁할 때면 큰소리를 치곤 했다"며 웃음지었다.
70년대가 지나면서 철선(승선원 11명)의 등장으로 구룡포의 고래 문화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대량 포경이 가능해지면서 구룡포의 고래잡이 목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고래가 북으로 회유하는 12월부터 3개월간 구룡포는 포경을 멈추고 긴 휴식기에 들어갔다.
또 포획된 밍크고래 대부분이 일본으로 비싸게 수출되면서 구룡포에는 돈도 많이 나돌았다.
70년 말부터 7년간 포경선을 탄 장서구(51·구룡포4리)씨는 "고래고기가 구룡포에서 많이 유통되다 보니 울산 포경선에도 구룡포 어민들이 많이 탔다"면서 "고래를 찾기 위해 만든 8m 높이의 망루는 흔들림이 심해 구룡포에서 뱃멀미를 제일 안 하는 사람 차지였다"고 회고했다.
86년 포경이 금지되고 4, 5년이 흐른 90년도 초반에야 고래고기전문식당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 예전에는 하루에 서너 마리씩 고래가 공급돼 전문식당이 필요도 없었지만 포경이 금지된 뒤에는 고래가 귀해져 이따금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 1, 2마리만 유통되다 보니 전문식당이 나타난 것.
고래 가격도 많이 뛰었다.
80년 초 250만 원하던 7m짜리 밍크고래가 지금은 3천여만 원 수준에서 거래돼 그야말로 '바다의 로또'로까지 불리고 있다.
포항·박진홍기자 pj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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