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스피러시'라는 영화가 있다. "어떤 일이든 우연은 없다. 세상은 몇몇 소수자의 음모에 의해 돌아간다"고 떠들어대는 주인공 멜 깁슨이 영화 내내 과대망상증 환자나 떠버리쯤으로 치부되지만, 결국은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낸다는 스토리다.
영화를 관통하는 '음모 이론'은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가끔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잘 맞춰진 각본에 의한 것처럼 진행될 때 한 번쯤 씹어보게 된다. 2008학년도 대학입시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 꼭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 멜 깁슨처럼 생각해 보자.
'예전에는 대학에 갈 때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렀다. 이때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여건이 학교뿐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실력으로 대입 시험을 치렀고, 교사들은 기출문제다 일본 입시 문제다 하면서 학생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그러던 차에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고 학력고사 체제로 바뀌었다. 음모자들은 얼씨구나 쾌재를 불렀다. 실력 이외의 요소가 작용할 수 있는 틈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사교육이라는 거대한 학교 밖 체제 조성을 부추겼다. 적당히 단속하고 금지하면서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대세로 삼았다. 돈 있는 자, 여유 있는 자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이다.
암기 위주 공부라는 비판이 일자 수능시험 체제를 도입하면서 그들은 다시 한번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통합교과적 문제, 실생활 적용 문제라는 미명 아래 학교 교육의 취약함을 가속화했다. 학교만 다녀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구조, 투자를 늘릴수록 좋은 대학에 가는 시스템을 고착화했다.
학교 교육 위기론이 대두하자 이번에는 내신 위주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수능과 내신을 등급화해 대학들의 변별 기준을 약화시켜 버렸다. 고교별 격차를 반영할 방법도 주지 않았다. 대학은 당연히 우수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되고, 서울대가 논술 비중 확대라는 방안을 내놓자 상위권 대학들도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됐다.
논술과 면접은 이미 학교 공부만으로 대비하기 힘들 정도로 만들어둔 상황이다. 2004학년도 서울대 자연계 학업적성평가 문제를 한 번 보자. 「평면의 한 점에서 쌍곡선 y²-x²=1에 접선을 그을 때, 서로 다른 두 개의 접선을 그을 수 있는 점 (a, b)의 집합을 구하시오.」 종이에 풀면 본고사라고 몰매 맞지만 말로 설명하게 하면 구술면접고사다. 교과서 실력으론 해석 못 하는 영문과 한자를 섞은 제시문을 주고 종이에 해석하라면 본고사지만 말로 요약하라면 구술면접고사다. 고려대는 이미 논술에도 수학 문제를 냈고, 다른 대학들도 따라갈 추세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만, 앞으로도 지필고사 형태의 본고사만 금지하면 결국 가진 자들만의 잔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이 같은 음모 이론으로 보지 않더라도 대학입시는 이미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판가름나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떠버리 택시 운전사가 음모를 밝혀내지만 우리 교육 현실은 누구도 해결하기 힘든 시스템의 굴레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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