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철언 회고록 어떤 내용 담겼나

"근대화·산업화 세력, 민주화투쟁 세력에 대한 공과가 제대로 평가돼야 합니다.

"

박철언(62)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적 통합과 화합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 증인으로 바른 기록과 진실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다"며 "이런 생각을 갖고 사실적 기록과 경험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5공과 6공에 걸쳐 권력 핵심부에서 △대북 비밀 접촉 △3당 합당 막후 조정 △북방정책 등을 주도하는 등 20년 동안 경험한 정치 비사(秘史)를 담겠다는 것.

박 전 장관은 "80년부터 2000년까지 기록한 내용이 300쪽짜리 다이어리 20권, 메모노트 120권 분량"이라며 "이를 800쪽의 책으로 엮을 것"이라고 말했다.

1부는 5공 청와대 비서관 시절, 2부는 5공 안기부특별보좌관 시절, 3부는 6공 전반기, 4부는 대북 비밀접촉 및 북방정책기, 5부는 6공 후반기, 6부는 YS·DJ 시절 등 모두 6개 부분으로 나눌 계획이다.

그는 "회고록에 담긴 내용은 실제 경험과 증언만을 바탕으로 했으며, 모두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비사"라며 "3당 합당, 남북 비밀접촉, 5.6공 대통령의 주요 정책결정, 북방정책과 미국의 개입 과정 등에 담긴 내막이 드러나면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5·6공과 YS 비자금 등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3당 합당 과정에 얽힌 뒷거래와 숨은 이야기도 낱낱이 밝히겠다"고도 했다.

대북특사와 관련, 박 전 장관은 "남북 긴장완화, 통일방안 협의, 정상회담 개최 등을 위해 85년부터 91년까지 북측과 42차례 비밀 접촉을 했는데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났고, 김정일 위원장과는 행사장에서 수차례 대면했다"며 "이 중 20여 차례는 직접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회고했다.

또 "85년 말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양측이 합의단계까지 갔으나 '부산 청사도 간첩선 사건'이 터지면서 무산됐다"고 전했다

박 전 장관은 "남북비밀회담의 우리 측 암호명은 '88계획'이었으며, 85년 미국의 오해를 풀기 위해 CIA, 안기부, 외무부, 통일부 관계자들과 '한·미 협의회'도 가졌다"면서 "남북 양측은 비밀회담을 위해 '적십자 실무자'로 위장했으며, 남측은 그랜저와 그라나다, 북측은 벤츠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당시 북측 비밀특사는 한시해 외교부 부부장, 허담 노동당 비서 등이었으며 회담 장소는 평양 모란봉 초대소, 백두산 삼지연 주석별장, 판문점 북측지역 등이었고, 남쪽에서는 판문점 평화의 집, 서울 신라호텔 및 워커힐 쉐라톤 호텔 독립빌라, 제주도 한라산 등을 주로 이용했다는 것.

박 전 장관은 남북 비밀접촉의 성과로 △남북간 비밀 핫라인 설치 △남북축구 교환경기 △청소년 축구 및 탁구 남북단일팀 구성 △고향방문단 및 예술단 공연 등을 꼽았고, 91년 말 남북 총리 간 공개회담에서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는 모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5·6공의 불화와 관련, 박 전 장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6공으로부터 비자금 수사 등을 받으면서 곤욕을 치를 때는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나를 암살시켜라'고 측근에게 얘기했다"고 비화를 전했다.

박 전 장관은 "박·전·노 전직 대통령은 장기집권, 권위주의, 인권소홀 등 오점이 있고,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을 모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면서도 "가난을 탈피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고, 북방정책으로 세계화 외교를 편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YS는 군사문화를 청산했고, DJ는 IMF를 극복하고 대북 화해정책을 편 것 등이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했다.

박 전 장관은 "회고록을 통해 현대사의 사실적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등 양대 세력이 이젠 공과 몫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와 대타협을 이뤄내 미래를 위한 선의의 정책 경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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