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이 학원 저 학원을 떠도는 '유목민 아이'들. 한껏 뛰놀며 밝게 자라야 할 우리의 새싹들이 부모의 '과욕'에 눌려 찌들고 있다.
◇공부만 하는 아이
지난달 29일 대구시내 모 사립초교 1학년 1반. 가장 많은 학원에 다니는 '특별한' 학생 현우(가명)를 만났다. 현우는 영어 2곳에 중국어, 책읽기, 피아노, 미술, 태권도 등 7개 학원을 오가고 국·영·수 학습지까지 구독하고 있었다.
현우의 학원 '순례'에 동행했다. 현우는 오전 8시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부리나케 달려갈 때가 많다고 했다. 낮 12시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원어민 영어전문학원 차량에 올랐다. 오후 2시쯤 집에 잠시 들러 원어민 영어 방문교사에게 1시간 동안 영어회화도 배웠다.
이내 또다시 집 밖을 나섰다. 중국어, 책읽기, 피아노, 미술, 태권도학원이 줄줄이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순례를 마치고 난 시간은 오후 7시 무렵. 축 처져 집으로 돌아왔지만 국·영·수 학습지가 현우의 지친 머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저녁밥이 넘어갈 리 만무. 현우는 그 좋아하던 만화영화 TV시청도 마다하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토, 일요일도 쉴 수 없다. 인근 문화센터에서 지능교육을 수강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내 아이만큼은 '특별'하게 키우고 싶지만 지쳐가는 현우를 볼 때면 가슴이 쓰라린다"고 말했다. 담임 교사는 "요즘 현우가 통 말이 없고 혼자 놀 때가 많다"며 걱정했다.
◇학원, 학원, 학원….
이 사립초교 전체 115명의 1년생 중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은 단 1명에 불과했다. 학원을 5개나 다니는 학생들이 19명(16.7%)에 달했고 6개(8명), 7(2명)개라고 응답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학원 과목만 영어, 중국어, 음악, 미술, 발레, 체육, 지능교육, 글씨 쓰기, 책읽기, 성악, 동화구연 등 수십 가지에 이르고 있었다.
조기교육 열풍은 영유아들에게로 확산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찾은 대구시내 모 사립유치원의 경우 학생 49%(85명)가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평균 학원 숫자는 1.8개에 달했다. 나이별로는 만3세 19명 중 8명, 만4세 59명 중 22명, 만5세 95명 중 55명이었다. 5~7세 가냘픈 꼬마들은 오전 8시 전후에 유치원에 등교해 오전을 꼬박 유치원에서 보낸 뒤 보고 싶은 엄마의 품이 아닌, 학원으로 직행하고 있는 것.
유치원 교사는 "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유치원에서도 영어, 미술, 음악 등 특기교육을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원생 대다수가 3개 학원 이상 다니는 셈"이라고 했다.
◇돈, 돈, 돈…
대부분의 학부모는 "자녀 양육비의 70, 80% 이상을 차지하는 사교육비 부담에 허리가 휘청거리지만 내 아이가 남들에게 뒤져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며 "일단 시키고 본다"고 말했다.
맞벌이를 하는 우진(7)이 부모는 외아들의 영어 사교육비에만 월 50만 원 이상을 쓴다. 영어 전문교사를 둔 사립 유치원(월 30만 원)을 선택했고, 방과 후에는 원어민 영어전문학원(주 3회, 월 15만 원)에 보내고 있다. 여기에 주 2회 영어 학습지(월 6만 원)까지 구독하고 있다. 우진이 엄마는 또래에 비하면 그래도 부족하다고 했다.
영어유치원의 월 수강료도 천차만별이다. 원어민으로만 교육하면 50만 원, 한국인과 원어민이 반반씩 교육하면 40만 원, 한국인들만 교육하면 30만 원 선이 되는 식. 이에 따라 대구 영어유치원들은 '원룸'까지 따로 제공해 가며 원어민 강사 모시기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한 학부모는 "초교 2, 3학년이 되면 영어 조기유학에 대비해 회원제로 운영하는 연 200만 원 수준의 체육교실에 등록해 골프, 승마, 스키 등 고급 레포츠를 배우게 하는 부모들도 있다"고 했다.
또 성현(초교 1년)이는 영어, 한자 학원에다 동화구연, 성악, 미술 학원을 오가고 있다. 엄마는 "동화구연, 사생 대회 등 학교에서 실시하는 각종 경연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국·영·수 이외에도 예체능학원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수(5) 엄마는 아빠의 반대에도 동화책, 플래시카드, 테이프, 비디오 등 각종 유아 학습 교재에 상당한 돈을 들이고 있다.
엄마는 "어려서 무엇을 보고 듣는가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결정된다 "며 "지금까지 구입한 교재만 700, 800개로 돈으로 따지면 수천만 원은 될 것"이라고 했다.
경북대 소아정신과 정성훈 교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학습한다고 가정할 때 아이들은 보고 들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라며 "감성 없는 지성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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