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전! Travel라이프 유럽 배낭여행-(12)호흡하는 신화-파리

신화는 곰방대를 문 호랑이가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품어대던 시절,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만들어낸 집단 상상력일까. 아니면 진실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조물주와 신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새어나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게 된 것일까.

파랑새를 찾아 기약없는 길을 나섰던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첫 걸음이 이랬을까. 신들의 이야기를 좇아 파리행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 밀려오는 두근거림은 소풍을 앞둔 아이의 천진난만한 것일 수만은 없었다. 결국 '파랑새는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란다'라는 말을 되풀이할까. '부디 이런 진부하고 식상한 끝맺음에는 이르지 말자'는 나의 다짐은 아무래도 한달간의 유럽 여정 내내 나를 다그칠 것 같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을 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시내로 접어들기 위해 머리가 희끗한 직원 한 명에게 길을 물었더니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으로 길을 가르쳐 준다. #@$##@@! 못 알아들어 다시 물었다. 최대한 공손하게. "I beg your pardon?" 이번엔 버럭 화를 낸다.

꼭 성질 급하고 심술궂은 할아버지 같다. 불어는 버터 잔뜩 발라 돌돌 굴러가는 말인 줄 알았건만 짜증이 섞이니 아프리카 오지마을 언어만도 못하다. 감으론 도저히 해독 불가다. 바바리 코트 깃을 칼같이 세운 친절한 파리지앵에 대한 나의 환상은 10분을 못 갔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자신의 집을 찾은 나그네에게 베푸는 친절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트로이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전장으로 떠난 남편이 감감무소식이자 그녀의 재산을 노린 주변의 숱한 남자들로부터 뻔뻔스런 구애를 받는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그 구혼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면서 그 수의가 완성되는 대로 그들 중 한 명의 구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다시 풀며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기지를 발휘한다. 얼핏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만 신화시대의 그리스에서 나그네는 신의 다른 모습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그네에게 베푸는 친절이 박한 것을 보니 왠지 프랑스에서 신화의 흔적을 찾기가 녹록지 않을 것만 같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며 나는 파리 최고의 번화가 샹젤리제 거리로 향했다. 샹젤리제(Champs Elysees)는 '엘뤼시온의 들판' 즉, 신화 속의 극락을 말한다. 결핍이 없으니 불만이 없고 불만이 없으니 불안하지 않은 곳. '상젤리제'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바람은 자신들 수도의 중심을 그렇게 명명하게 만들었다.

신화 속 엘뤼시온의 들판은 21세기 파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활해 있을까. 왠만한 봉급쟁이 연봉쯤 떡 주무르듯 하는 명품가가 집결한 몽테뉴 거리, 온갖 볼거리, 할거리, 먹을거리로 가득찬 그 거리 상젤리제는 분명 세련되고 풍요로워 보인다.

현대판 샹젤리제에 넋을 빼앗긴 채 잠시 걷다 보니 허술한 차림의 한 동양 여자가 말을 건다. "재퍼니즈? 노! 차이니즈? 노!" 귀찮아 먼저 대답한다. "코리안! 사우스 코리안!" 동양 여자를 보는 외국인들은 십중팔구 일본, 아니면 중국인인지 확인한다. 호감이 길면 코리안까지 묻는 경우도 있으나 이쯤 되고 보면 대부분 답하는 쪽에서 먼저 코리안이라고 하게 된다. 묻는 순서야 엿장수 맘대로겠지만 남의 것 탐내는 데는 2등 안 하는 두 나라 다음이고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한국인인 걸 확인한 그 여인, 유창한 영어로 '루이뷔통 가방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일인당 판매량을 정해놓다 보니 감질난 중간 상인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사람 가려 파는 오만한 상술이 먹히는 걸 보니 그들에게 이곳은 분명히 '샹젤리제'다. 고급 부티크가 늘어선 몽테뉴 거리 한쪽에 라틴계 여자아이 하나가 얼굴을 숙인 채 앉아있다. 앞에 놓인 종이에 불어로 뭔가가 적혀 있는데 아마도 구걸을 하는 모양이다.

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서는 점심조차도 즐기기보다는 때우기 쪽으로 가야할 것 같다. 이곳저곳의 테이크아웃 샌드위치점을 들락날락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업원들이 맞춘 듯이 유색인종이다. 맞은편 몽테뉴의 부티크가 온통 백인천지인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고 보니 관광객을 빼고 나면 오가는 사람들조차도 피부색이 확연히 달라보인다. 신들의 샹젤리제와 달리 인간계의 샹젤리제는 피부색에 따른 구별이 있나보다.

콩코드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다 문득 시선이 간 곳이 아까 그 명품 부티크 골목이다. 대충 어림잡아 네댓시간은 넘었을 거 같은데 아까 그 여자 아이가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그런데 아직 그 앞엔 1유로짜리 동전 하나도 없다. 이제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오늘 하루 그 아이는 아무래도 빈손으로 집으로 가야할 것 같다. 3유로짜리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 나에게도, 몇 시간을 웅크리고 앉아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그 아이에게도, 파리의 샹젤리제는 아직은 그들만의 '샹젤리제' 같아 보인다.

강건해(프리랜서 작가)

사진: 1. 샹젤리제 거리의 모습. 소위 명품족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2. 몽테뉴 거리 한쪽에 얼굴을 숙인 채 앉아있는 라틴계 여자아이. 네댓시간 넘게 구걸을 했지만 허탕을 쳤다. 아마도 오늘 하루는 빈손으로 집에 가야 할 것 같다. 3.샹젤리제 한쪽에 자리잡은 루이뷔통 상가들. 대형 루이뷔통 가방이 눈길을 확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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