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신을 믿고 우리는 그것을 종교라 부른다. 그리스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인간에게 천상의 불을 훔쳐다 준다. 그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산 채로 간이 파 먹히는 참혹한 형벌을 감수해야 했다. 신화 속에서 보자면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인류의 조물주가 되는 셈이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이곳 유럽에서 보자면 참으로 불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파리인들의 사랑을 받는 튈르리공원이 있다. 피라미드를 마주보며 이곳을 걷다보니 꼭 루브르의 앞마당을 걷고 있는 것 같다. 튈르리는 언뜻 보면 조각공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조각상들로 가득하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영웅 테세우스에서부터 혼신의 애정을 쏟고도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하자 결국 신화시대 최고의 악녀로 변절하는 메데이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신화의 대표 주자들이 다 모여있는 듯하다.
조각상들을 보자니 신화의 주인공들이 과거의 화려했던 위용을 뽐내며 우아한 입상으로 조각된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들은 하나같이 신화 속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신화 속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 조각이 나타내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과연 알고는 있을까. 살짝 의문이 생긴다.
루브르 쪽을 향해 조금 더 걸으니 늘어선 노천 카페들이 보인다. 작은 연못을 끼고 있는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한잔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대부분이 연인이다. 시선이 마주친 한 커플에 눈인사를 건넸더니 "봉쥬르"하고 화답한다. 주저하며 말을 잘 잇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한국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기행을 왔다고 했더니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반긴다. 마침 그 연못엔 아틀란타와 히포메네스의 조각상이 놓여있어 아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과장된 액션으로 답한다. "Sure."
커플 중 여자가 말하기를 아틀란타가 사과를 줍기 위해 멈춰선 것은 아틀란타 역시 히포메네스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렇지 않고선 한 나라의 공주인 여인이 황금 사과 몇 개에 마음이 흔들렸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여인! 참 주관적이긴 하지만 신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신화 속 아틀란타는 매우 매력적이고 힘이 넘치는 여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결혼을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혼자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걸어 자기를 이기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 최고의 빠른 발을 가졌고 누구도 달리기에서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달리기에서 패배한 남자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음에도 구혼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 중 한 남자인 히포메네스가 있었다. 아틀란타에게 반한 히포메네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청을 넣어 황금사과 세 개를 얻게 되고 달리기 시합 도중 결정적 순간마다 그 사과를 던진다. 아틀란타는 황금사과에 넋이 빠져 그걸 줍느라 결국 달리기에 패하게 되고 히메네스는 사랑하는 아틀란타를 얻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에는 아틀란타의 숨은 속내까지도 보이는 모양이다. '이름 정도나 알고 있을까'하는 의구심에서 물었던 나는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생각해보니 이름이나 제목 한 자 없는 조각상들이 신화 속 장면을 연출하고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이 잘 모를거라 의심한 내가 어리석었다. 문학을 제외하곤 그리스신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내게는 그런 그녀의 여유로운 사고가 부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신화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문화의 뿌리 위에 자란 유럽인들에게 지금껏 글감을, 모델을, 예술 소재를 제공해왔다. 이들에게 그리스신화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문화적 에너지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파리의 한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듣는 그리스신화 이야기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때로는 재미난 연극의 한 대목처럼 들리는 것은 종교적 무게감을 벗어던진 신화가 이들의 문화 속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강건해(방송작가)
사진: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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