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돌아 들어가니 따가운 햇볕을 피한 듯 그늘 한쪽에서 마늘을 까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보였다.
칼 끝에 물을 묻혀 날렵하게 손질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 손에는 물집과 굳은살이 가득 박여있었다.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의 병원비,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의 간식비가 투박한 그의 두 손에 달려있다.
그는 8천 원을 벌기 위해 종일 밤과 마늘을 까고 있지만 그것도 일이 있을 때나 얘기지,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리 많지 않다.
5년 전 곤히 잠을 자던 남편이 코피를 흘렸다.
배갯잇 하나를 다 적시도록 한 번 흐른 피는 멈추지 않았다.
솜을 틀어막고, 고개를 젖히고, 콧등을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남편은 혈소판이 남들보다 적은 혈소판 감소증이었다.
대구지역 어느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했지만 그리 큰 걱정은 말라고 했다.
남편도 '코피 한 번 흘린 것이 무엇이 대수겠냐'며 철근을 세우는 공사장으로 향했다.
1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들고 들어오는 남편의 병은 조금씩 깊어져갔고 지난해 12월 설석원(44·서구 비산동)씨는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는 백혈병을 선고(?)받았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한 푼 두 푼을 얼마나 어렵게 모았는지 아세요? 근데 한 차례 항암치료를 하고 나니 한 푼도 남지 않았어요. 왜그리 악착스럽게 살았는지?"
부인 김미향(46)씨는 남들 얘기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그래야만 감정을 추스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설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어느 병원에서 한 차례 항암치료를 받고 곧 퇴원했다.
매주 목요일마다 몇 백만원씩 불어나는 병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구역질을 하면서도 밥을 입 속으로 밀어넣는 남편을 김씨는 눈물을 훔치며 지켜봐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 살리겠다고 이를 꽉 물었다.
1천200만 원짜리 전셋집을 내놓고 140만 원짜리 사글세로 옮겼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구간 일부를 하청받아 사업을 했던 설씨는 파산했다.
일꾼들의 밀린 노임을 지난해 겨우 갚았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90여만 원의 생활비는 고스란히 병원비로 빠져나간다.
"남편은 자살한 친구의 두 딸을 위해 몇 년 동안 한 달에 30만 원 씩 생활비를 보낸 사람이에요. 뭘 바라고 좋은 일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일이 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야 하는 거죠?"
학교를 마친 딸 재희(9)가 아빠 곁으로 와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열이 별로 없네. 아빠 이제 안 아파?"
늘 누워있는 자신을 위해 딸은 친구들이 모두 학원이나 어린이집으로 향해도 보채지 않는다.
9세 같지 않은 어른스러움이 오히려 이 부부의 가슴을 더 후벼판다.
오는 16일 2차 항암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병원비 때문에 빌린 돈만 벌써 2천만 원이다.
무균실에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선 앞으로도 수천만 원이 필요하다.
골수기증자가 나타나도 지금 형편으로는 암담할 뿐이다.
"이웃에서 고기며 밑반찬을 조금씩 갖다주거든요. 신문을 보면 온통 나쁜 사람들 뿐이지만 아직도 우리가 사는 이곳엔 착한 사람, 따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아요. 힘들어도 우린 희망을 잃지 않겠어요."
저희 '이웃사랑' 제작팀 계좌번호는 대구은행 069-05-024143-008 (주)매일신문입니다.
서상현기자 ssang@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