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한 말씀만 하소서

급변하는 환경 때문일까, 여기저기서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고 아프지 않은 것이 있을까마는 특히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은 마음을 온통 잿빛으로 만든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가 생각난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채 1년도 되기 전에 외아들을 잃는 참척을 당한 뒤의 비통함과 마음 다스리기의 과정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머니가 적어 내려간 글이다. 딸 넷에 아들 하나, 그 아들을 가슴에 묻고 악몽이길 바란 필자가 하늘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해서 그 원을 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자상하게 그려주고 있는 이 글은 죽은 아들을 기억하며 그 아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로 하루하루가 고통의 날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와 세상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지형도다.

누구에게나 참척 같은 고통과 슬픔은 당장에 너무 커서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또한 견딜 만한 것임이었음이 쉽게 판명난다. 아우슈비츠의 절망 속에서 겨우 살아난 사람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에게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준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답은 의외였다. "나를 살게 한 것은 아침 저녁 손바닥 만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으로 내다본 수용소 마당 한쪽에 있는 이름 모를 작은 풀 한 포기였다."

죽음을 너무 가벼이 생각해서도 안 되겠지만, 삶 또한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삶의 의미는 살랑이는 미풍에도, 그 미풍에 흔들리는 풀잎에도, 풀잎과 이웃한 이름 없는 들꽃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다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마음의 자세가 문제일 뿐이다. 살아야 한다. 죽어서 모든 것을 잃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깝다. 살아서 당하는 고통보다 죽어서 남기는 슬픔이 훨씬 크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견뎌야 한다.

박완서의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라는 구절이 새삼 큰 의미로 다가오는 아침이다.

노상래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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