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를 호령하던 영광과 좌절의 2천년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 고마츠 히사오 외 지음/ 소나무 펴냄

만년설이 묻어나는 고산준령과 광대한 초원 위를 질주하는 유목민, 끝없이 붉게 펼쳐진 사막, 수백 년에 걸친 풍화로 백골처럼 허물어져버린 문명의 잔재들. 중앙 유라시아에 대한 짧은 단상들은 몰락한 명문가의 잡초 무성한 마당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다. 최근 중앙 유라시아 지역이 부존 자원의 보고로 알려지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곳은 우리에게 가끔 역사책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낯설고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중앙 유라시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드넓고 유서깊은 지역이다. 동서로는 동유럽에서 몽골고원까지, 남북으로는 시베리아 남부의 삼림지대에서 티베트 고원과 이란 동북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이를 정도로 광대하다. 지금의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내몽골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 티베트 자치구, 러시아 부랴트공화국, 투바공화국, 바슈키르 공화국, 타타르 공화국 등 구대륙의 절반을 차지한다.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는 중앙 유라시아가 겪은 영광과 좌절의 2천 년을 한눈에 일깨워주는 통사다. 광대한 초원과 사막을 무대로 펼쳐지는 각 부족들과 국가, 문화의 교류사를 찬찬히 짚어내고 있다. 특히 고대와 중세에 편향되거나 유목민 위주로 기술됐던 기존의 개설서와는 달리 근'현대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인식의 폭을 넓혔다.

오아시스민들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떻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지, 거친 초원에서 일어난 유목민이 어떻게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는지가 대하사극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아울러 화려했던 문화가 쇠락하고 강성했던 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중앙 유라시아의 두 축인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은 삶을 유지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초원지대를 무대로 번성했던 유목민은 인류 역사에 굵고 깊은 자국을 남겼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위협하고 유라시아 청동기 문화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스키타이, 오늘날 내'외몽골을 무대로 한나라와 치열한 각축을 벌인 흉노,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켜 유럽을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한 훈족, 몽골 고원 동북 변방에서 일어나 동서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몽골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민 집단이 중국과 주변 세계에 미친 크고 작은 영향까지 합하면 유목민이 행한 역사적 역할을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옛 소련 중앙아시아 지역은 오아시스 정주민(쿠샨조, 둔황)의 터전이었다.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서 샘이나 만년설이 녹은 물을 모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조성된 오아시스는 동서문화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실크로드는 오아시스와 오아시스가 연결된 국제 교통로였고, 이 통로를 따라 물자와 문화, 사람이 오고 가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선진 문화의 수용과 중개 무역을 통해 얻은 경제력은 동서양의 외래 문화를 통합, 간다라 불교 미술 등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처럼 초원의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은 유라시아 역사와 문화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유목민은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세계사의 혁신 세력으로 등장했고 오아시스 정주민들은 존재 자체가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이자 신 문화 창조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들어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면서 낙타에 화물을 싣고 오가는 대상무역을 중심으로 했던 중앙유라시아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의 대륙진출은 중앙유라시아의 사회 구조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20세기 발생한 사회주의 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중앙유라시아 거주민들은 피지배민으로 전락했고 전통 종교를 포기하거나 존립기반인 초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앙유라시아에 민족해방과 자치권 확대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민주화와 인권, 개발과 환경, 민족 문제, 소련 해체후의 안보문제, 자력갱생,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대립이라는 어려운 문제들이 남았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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