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육복지)술 취한 아버지가 두려워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엄마와 3형제에게 마구 주먹을 휘두른다. 이웃들은 "며칠 전 아저씨가 아줌마를 막 때리는데 죽이는 줄 알았다"고 전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 형 영훈(가명·14)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PC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린다. 아버지가 잠들어야 슬며시 들어갈 수 있기 때문.

동생 영수(가명·12)와 영호(가명·11)는 방과 후 공부방으로 향한다. 공부방도 마치면 밤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파출부로 일하는 엄마를 기다린다. 요즘 엄마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도 아침 일찍 일을 나간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밥은 뭐….'라며 말끝을 흐렸다.

서구 비산동 한 지역아동센터(공부방)에서 만난 영호는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분홍색 셔츠와 하얀색 바지를 개량 한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에 볼살이 넉넉한 영훈이는 배가 불룩한 데도 팔, 다리는 이상하리만치 아주 가늘었다.

"아빠, 엄마가 술 좀 안 먹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회초리로 손바닥과 종아리를 때리고, 아빠는 그냥 막 때려요. 안 맞아본 곳이 없어요."

영호는 결핍행동을 보이는 내성적인 아이다. 말끝을 분명히 맺지 못하고, 쭈뼛쭈뼛한 자세로 늘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잘못한 일이 없어도 늘 눈치를 보고 늘 자신이 없어 입 안으로만 응얼댄다.

이곳 유창렬 총무는 "우리가 흔히 불우이웃이라고 부르는 가정의 아이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큰소리로 오버(over)하거나 말꼬리를 잡는 '과잉형'과 영호처럼 극도로 내성적인 '결핍형'으로 나뉜다"며 "해체 직전이거나 이미 해체된 가정의 아이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30여 명이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형편이다.

유 총무는 또 "상처받는 기간이 길수록 회복, 치유가 힘들기 때문에 공부방에는 가급적 어린 나이에 올수록 좋다"며 "중학생만 돼도 이런 곳을 유치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나마 영호는 공부방에 잘 적응한 편이다. 공부방이 좋은 이유에 대해 영호는 "우선 심심하지 않고, 밥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아빠가 여기 없기 때문"이라고 응얼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영호에게 이곳은 그나마 마음놓고 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동구의 한 청소년학습문화공동체. 소년소녀가장, 편부·편모 가정 등 저소득층 중·고생들이 방과 후 학습을 하는 곳이다.

이승혜(가명·16)양은 이번 중간고사에서 영어, 수학이 10점 이상씩 올랐다며 공부방 문을 열자마자 자랑했다. 하지만 승혜는 아픔이 많다. 승혜의 아빠는 허리 디스크를 앓으면서도 일을 구하러 다니고 있고 저혈압·관절염 등 작은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엄마도 쳐다보기 힘들다. 할머니까지 함께 모시고 있다. "친구들은 다 학원다니며 공부하는데 우리집 형편으로는 어렵잖아요. 학교 선생님이 소개해줘 이곳으로 왔는데 공부도 할 수 있고 주말에는 춤, 노래, 촬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어 참 좋아요. 내신점수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은주(20·여·영남대 화학공학과 1년 휴학)선생님은 "승혜는 영어 구문 해석을 시키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엔 말도 많고 장난도 많이 치는 이상한(?) 아이가 됐지 뭐예요"라며 놀렸다.

서혜진(가명·16·중 3년)양은 "공부방은 학교와는 달리 모르는 것을 편하게 물을 수 있고 공짜여서 좋다"며 "게다가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이 서로를 이해해준다"고 했다.

최선희(37·여) 센터장은 "그나마 공부방을 찾는 아이들은 교육복지의 혜택을 받고 있는 편"이라며 "수면 아래에서 갈 곳도, 할 것도 없이 방치된 아이들을 사회 속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더불어 사는 삶도 모른 채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내팽개쳐진 아이들에게는 '가난의 되물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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