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서적 공감대 만들기

자녀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투자에 비례하여 기대하는 바를 성취하고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모들이 고개를 흔든다. 그만큼 허탈감도 커진다고 푸념한다.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에 위기를 느낄 정도로 힘들다고 고백한다.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가정도 많다. 자식에게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자녀 교육 전문가들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모든 투자와 노력은 허사가 된다고 말한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지적, 인격적 성장을 위해 정서적 공감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모와 자식이 추억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부모의 자세부터 되돌아보라고 조언한다. 자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돈과 관심은 엄청나게 투자하지만 정서적 교감은 잊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바쁘다는 핑계로 경제적 지원만 해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녀는 당연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자녀가 기대만큼 공부를 못 할 때 그동안 물질적으로 제공해준 것만 생각하며 아이에게 악담과 실망의 말을 퍼붓지는 않았는가.

이런 태도를 가진 부모 아래서 자라는 자녀는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부모의 수고도 모른 채 주위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만을 중심에 두는 습관이 든다. 바람직한 성장이 이루어질 리 없다.

영국의 어느 연구소는 부모 특히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집 자녀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공부는 물론 정신적'정서적 성장과 관계되는 일까지 가정 밖에 맡겨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학원에서 자녀의 학습은 물론 생활까지 지도하는 것이 온당한 모습은 아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모든 것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전문가들은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충고한다. 공부를 떠나 부모 자식 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이벤트가 많아야 한다. 다양한 가족 이벤트는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며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해 준다. 굳이 특별할 필요도 없다. 일상 속에서 공유하는 생활 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 사례들을 읽으며 우리 가정에서는 당장 어떤 것이 가능할지 생각하고 실천해 보자. 자녀의 성공은 거기에 달려 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 사례- 자연 속에서

대구 범물동에 사는 주부 A씨. 첫째 딸은 대학 의예과 2학년이고 둘째 아들은 고1이다. 남편은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첫째가 고3일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 가족은 지금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늘 가족이 함께 한 산행 덕분이라고 말한다.

A씨의 남편은 첫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2 겨울까지 매주 일요일 가족을 데리고 용지봉 산행을 했다. 가족들은 산을 오르면서 노루귀, 깽깽이풀, 할미꽃, 양지꽃, 은방울꽃, 뻐꾹채 등등의 야생화들이 언제 어느 비탈에서 피는지를 살피고 이야기했다. 해마다 은방울꽃이 만개할 때면 친구 가족들을 초대해 봄꽃 축제를 벌이곤 했다.

물론 시험이 임박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가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산행을 했다. "힘든 곳을 오를 때 손을 잡아 끌어주고, 쉴 때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고 합니다. 식은 김밥이라도 산에서 가족이 함께 먹으면 최고의 성찬이 됩니다."

병이 악화돼 움직일 수 없을 때도 남편은 아이들에게 산행을 권했다. A씨는 세상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학교생활이 어렵고, 인간관계가 힘들 때 산행을 하면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이해와 용서의 여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남편은 일찍 아이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 사례 - 책과 함께

P씨는 중3 아들과 중1 딸을 가진 전업주부다. P씨 가족은 남편이 봉급을 받는 주 일요일면 어김없이 서점에 간다. 결혼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17년간 계속된 가족 행사다. 동기를 묻자 고1 때 국어 선생님 때문이라고 했다. P씨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가르친 교과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다. 다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다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 봉급날 고기 썰며 외식하는 것을 여자의 행복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서점에서 만나 시집 한 권, 문예지 한 권이라도 사서 함께 읽을 수 있는 부부가 되어라. 아내가 현명하고 교양이 있을 때 자녀는 절로 잘 자라게 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주로 베스트 셀러류를 사서 읽었는데 아이가 생기고 성장하면서 아이 중심으로 책을 사게 되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한 달에 두 권 정도씩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책을 샀다. 독서 지도사 과정 강의도 들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이들의 독서지도를 잘 하기 위해서였다.

전에는 부모가 읽을 책을 정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보자는 책을 많이 읽게 된다. 그 덕에 아이와 함께 판타지 소설에 빠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각각 한 권씩 선정하기로 타협했다. P씨는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서가에서 책을 선택하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가족 공동의 책을 선정하기 위해 신문 서평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의 재미도 보통이 아닙니다."

▶ 사례 - 함께 식사하기

N씨는 현직 교사이다. 3년 전에 처제가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유는 처조카가 다소 의지가 약하고 공부에 열의가 적어 N씨의 지도와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학습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 끝에 N씨는 처조카를 한 달에 두 번 정도 집에 초대해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모는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조카는 먹고 싶은 것을 이모에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은 이모와 같이 시장에 가기도 했다. 시장을 오가면서 많은 이야기가 나누었지만 이모는 공부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N씨 역시 식탁에서 공부와 관계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먼저 공부와 관련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N씨는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충고와 지도를 해 주었다. 고3때까지도 식사는 계속됐다. 그 결과 중학교 때 전교 50등 안팎이던 아이는 고3때 전교 10등 안에 들게 됐고, 올해 원하는 대학 법대에 진학했다.

N씨는 말한다. "우리는 '식사요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가족 각자가 너무 바빠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기도 어렵습니다. 대화 단절의 원인이 되는 거죠. 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즐겁게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면 그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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