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왕(王)들의 골프와 리더십

조선 왕조 임금들 중에 누가 가장 골프를 많이 쳤을까.

실록에 의하면 이성계의 둘째 아들인 정종으로 알려져 있다.

정종이 즐겼던 골프는 요즘 같은 골프가 아닌 격구의 일종이었다.

당시 격구에는 오늘날의 '폴로' 경기처럼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로 공을 골대에 쳐 넣는 방식의 격구와 말을 타지 않고 막대로 공을 쳐서 맨땅의 구멍에 넣는 격구가 있었다고 한다.

정종이 심취했던 격구는 말을 안 타고 공을 구멍에 넣는 방식으로 요즘의 골프였던 셈이다.

정종이 아침 조정회의가 끝나자마자 오전 한나절 내내 공만 치고 오후에도 점심 먹고나면 또 공을 치러나가느라 국사를 팽개치다시피했던 이유는 골프만 즐겼지 정권엔 관심없다는 제스추어를 보임으로써 실세인 이방원의 숙청 칼날을 피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표면적 이유는 건강이었다.

정종실록에는 '내가 요즘 병이 생겨 마음과 기운이 나른하며 날로 여위어 간다. 오래 들어 앉아서 밖에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것 같아 우선 격구놀이를 해 기운과 몸을 기르려는 것이다'고 둘러댔다.

골프 운동덕분이었는지는 모르나 정종은 평균 수명 46세였던 조선조 왕들중 드물게 62세까지 살았고 이후 200년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어제 오후 3부 요인들과 함께 골프를 친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대로 잽싼 '샷' 폼을 보면서 세종대왕의 골프와 건강에 얽힌 일화가 생각난다. 세종도 정종처럼 골프 방식의 격구를 즐겼다.

그러나 국사는 관심없이 공만 친 정종과 달리 한글창제 등 문민통치에 더 많은 열성을 쏟은 세종은 골프를 즐겼음에도 당뇨병으로 고생 했는데 당시 마침 중국에간 사신이 '우리 전하께서 밤낮으로 국사 걱정하시느라 소갈병(당뇨)을 얻은데다 안질이 계시니 약을 얻고자 한다'고 한 사실이 드러나 귀국후 사절단 5명 모두 의금부에 가둬 심문하는 등 '가벼운 입'을 치죄했다. 국가지도자의 건강상태는 때로 국가 기밀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정보사항이라는 논리였다.

당장 오늘 아침 어느 신문에도 골프채를 휘두르는 노 대통령 앞에 엎드려 '앞으로 입조심 하겠습니다'고 읍소하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풍자한 만화가 실렸다.

이 총리가 왕조시절에 '임금께서 요즘 골프를 한번 치면 2주일쯤 쉬어 야 된다'며 허리가 불편한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떠벌렸더라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지 모를 일이다.

국가 지도자의 건강 상태나 건강에 관한 정보 보안이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예외가 아니다. 미국 CIA가 옛 소련의 브레즈네프 국가 원수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브레즈네프가 묵은 호텔방 아래층을 몰래 빌려 화장실 변기 파이프를 통해 채변, 건강 검진을 한 것도 하나의 예다. 모택동이 양자강에서의 수영 모습을 세계에 내보인 쇼도 마찬가지다.

국가든 가정이든 지도자의 건강과 강건한 이미지는 그만큼 중요하다. 특히 국가 지도자의 경우는 더 그렇다. 흔히들 말하는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말의 뜻도 '육체가 건강해야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더 뛰어 넘어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더 깊은 관점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유베날리스'가 그의 시(詩)에서 말한 그 말의 참뜻은 '사람이 몸만 튼튼하면 무엇하겠는가.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어 있을 때만이 비로소 튼튼한 육체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는 뜻에 더 가깝다.

정치 지도자들이 골프를 치든 등산을 하든 건강한 육체를 다듬는 건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육체만 건강할 것이 아니라 그 육체의 값어치를 존중 받을만한 리더십(건전한 정신)을 더 먼저 지녀야 한다.

정종의 골프는 육체적으로 오래 살긴 했으되 정신적 리더십이 없었던 경우고 세종의 골프는 육체는 고달팠으되 리더십이 있었던 경우다.

노 대통령의 경우 허리는 총리 말과는 딴판이라 다행이지만 리더십은 국민 여론 비율대로라면 아직은 C학점 수준이다.

남은 임기동안 골프를 통한 허리 건강과 함께 리더십의 개선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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