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생명의 전화

갑작스레 위급한 상황을 만났을때 사람들은 흔히 '119 구조대'를 머리에 떠올린다. 급한 환자가 생겨도, 교통사고가 나도, 엘리베이터에 갇혀도, 산에서 발목을 삐끗해도, 심지어 집열쇠를 잃어버렸을 때도 "도와주세요. 119!"다. 119 구조대원들은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만큼 바쁘고 고단하겠지만 시민들에겐 알라딘의 마법 램프 속 거인처럼 어떤 위기에서도 자신들을 구해줄 든든한 친구로 여겨지고 있다.

○…119 구조대가 위기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펴는 '슈퍼 맨'이라면,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름없는 천사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생명의 전화'. 온갖 아픔과 고민, 좌절감, 솟구치는 분노 등으로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며 함께 아픔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지난 1985년 개원한 '대구 생명의 전화'가 어저께 1일, 2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 해왔으니 친구도 이런 친구가 없다. 그동안 2천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현재도 2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간의 상담전화 건수가 20여 만건. 생명의 전화로 보는 세상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남녀문제 상담이 4만1천795건(20.9%)로 가장 많고, 부부문제 3만7천976건(18.9%), 성문제 2만3천931건(11.9%) 순이라고 한다. 세상이 하도 이상하게 돌아가서 최근엔 근친상간이니 스와핑(부부교환 성관계)이니 비정상적 성문제 상담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하나같이 무겁고 우울한 하소연들, 충격적인 성문제 상담에다 장난전화까지 적지 않아 웬만큼 단련되지 않은 자원봉사자들은 쉬 상처받고 견디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려던 사람들이 생명의 전화를 통해 다시 살 힘을 얻게 돼 고맙다는 말을 해올 때 봉사자들은 그 모든 심신의 피로감을 잊고 비할데 없는 기쁨을 얻는다. 외롭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무보수로 일하는 그들. 얼굴없는 천사들은 모두가 깊이 잠든 한밤중에도 졸린 눈을 부비며 '1588-9191'의 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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