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하나.
굶주린 여우가 어느 날, 잘 익은 포도송이가 많이 매달려 있는 포도밭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우에게는 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시렁 위에 포도송이가 매어져 있었다. 여우는 어떻게든 거기에 닿아 보려고 훌쩍 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마침내 지친 여우는 "아무나 딸 테면 따라지,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라고 말하고는 떠나버렸다.
이솝 우화 '여우와 신 포도'는 무엇인가를 얻으려다 실패했을 때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원치않았던 것처럼 가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비유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떨구고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휴대전화를 잃고는 "어차피 바꾸려 했던 고물인데…" 등등 하며 쓰린 속을 애써 달랜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의 '자기 합리화'가 아닌 '현명함'에 초점을 맞춘 해석도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은 되도록이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최근 지역사회에서 최고 이슈 가운데 하나가 된 공공기관 유치,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전의 유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지난 5월 중순까지만 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듯 시·도마다 한전 유치에 목을 매었고, 이는 대구시와 경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5월 말이 가까워지면서 슬그머니 분위기가 바뀌어 대구는 한전 유치 추진, 경북도는 한전 유치 포기로 가닥이 잡혔고, 2일에는 대구시가 갑작스레 한전 유치 포기로 돌아섰다. 경북도가 도로공사와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하려는 노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전 유치효과가 과다 포장됐으며, 다른 대형 공공기관을 유치하는 것이 지역발전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도 있다.
대구시와 경북도 모두 지역 발전을 위한 최선의 조합을 생각해서 공공기관 유치에 나선 것이 분명한 만큼 한전 유치 문제를 놓고 오락가락하는 일을 트집잡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혹시나 다른 시·도가 한전 유치를 신청하는 데 맞설 자신이 없어 '신 포도'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은 남는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지역발전의 중요한 전기이다. 한 번 결정되면 유치되는 기관의 비중·역할에 따라 시·도간 발전 속도가 엄청 차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시·도마다 주판알을 튀기며 서로 좋은 기관을 유치하느라 애를 태우는 것이다. 만약 만에 하나 한전이 '신 포도'라서 한전 유치를 포기한다면, 안 되는 일을 빨리 포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 여우의 '현명함'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안이 아닌가.
공공기관 유치 문제를 놓고 새어나온 대구시와 경북도의 불협화음도 우려되는 일이다. 처음에는 보조를 잘 맞춰 나가는 듯하더니 결국 엇박자를 냈다. 역시 한전 유치 문제 때문이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지역 경제여건이 다르고 발전 전략도 차이가 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광역자치단체여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광주·전남이 여전히 공동 보조를 맞춰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지역 정치권의 무기력증은 다시 한번 지적받아 마땅하다. 지역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당론을 내세워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뒤늦게 한나라당 대구시당 명의로 '대구에 한전을 비롯해 토공·주공·도공 중 2개 기관이 반드시 유치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성명 하나를 내는 데 그쳤다.
한 의원은 한술 더 떠 "대구는 이제 더 이상 정부·여당에 기댈 것이 아니라 대구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살길을 찾아야 한다"면서 "대구발전을 해결하는 길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공공기관 이전은 한나라당의 당론과 다르니 정부·여당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태무심하게 넘겨도 좋다는 말인가. 대구·경북의 국회의원이라면 당론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다급한 현안도 당연히 챙겨야하는 것 아닌가.
지역 현안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마저 '야당'이라는 이유로 공공기관 이전을 '포도송이를 포기하는 여우의 현명함'으로 대응하려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공공기관 이전 문제를 놓고 지역 정치권이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 정도로 대구·경북의 사정이 좋은 것이 분명 아닌데….
허용섭 정치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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