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암賞 수상 '충돌의 여왕' 김영기 박사

역시 큰 그릇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故 이병철 회장의 아호를 딴 호암상(과학상)2005년 수상자인 세계적인 물리학자 김영기 박사(44. 미 시카코대 교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CDF공동대표)는 촌음을 쪼개쓰는 극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모교인 하양초등, 하양여중, 남산여고, 고려대와 과학영재들이 모인 대구과학고 방문특강을 통해 섬세하게 후배들을 과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김박사를 만난 학생들은 "황우석 박사와 함께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김박사님을 만나보니 의외로 순수하고 세계의 '벽'이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펴보였다.

◆ 하양여중 선생님의 가르침이 밑거름

지난 1일 경산 하양여중 강당에 선 김박사는 여중시절에 가르침을 받았던 은사들을 뵈면서 울었다. 살아계신 은사님께 일일이 절을 올리면서 김박사가 눈물을 흘리자 어린 후배들은 같이 특강을 들으러온 무학고등 학생들과 함께 "울지마, 울지마"를 연호했다.

"흔히 여자들은 과학을 못한다고 그러는데 저는 아주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그런 편견을 깼습니다. 당시 경북대 과학경시대회에 출전하려던 저와 몇몇 친구들을 과학반 선생님들이 밤새 가르치면서 실습을 같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바로 과학반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 처음부터 큰 목표 세우지 않아

김박사는 "몇분(변삼수 하양여중 교장, 박영진 하양여중 교감, 윤효중 하양여고 교장)을 제외하고는 스승님 대부분이 퇴임하셨지만 새로운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여러분은 행운아들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하면 다 잘될 겁니다."

때로는 농땡이를 쳐도 믿고 다독거려준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게됐고, 그래서 그분들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김박사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려는 큰 목표를 가졌던 건 아니다.

"시작하면서 태산처럼 높고 큰 목표를 세워놓으면 어휴 저걸 어떻게 올라가나 부담부터 생기잖아요. 저는 그냥 흥미를 느끼면 파고들고 그 다음단계로 올라서고, 그렇게 순리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 시골에서 자라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 지녀

한국에서 첫 노벨상 수상자가 되느냐는 관심을 국내외서 받고 있는 김박사가 큰 인물로 우뚝서기에는 학교 선생님 못지 않게 시골(경산 진량) 부모님의 힘도 컸다. 면사무소와 능금조합에 근무한 아버지(김두을씨, 77세)는 연필까지 일일이 깎아줄 정도로 자녀 교육에 구체적인 역할을 했고, 어머니(차순란, 74)씨는 힘든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맡아하면서도 자녀들이 집안 허드렛일을 돕는 대신 그들만의 꿈을 키워나가도록 희생했다. 그래서인지 오빠(김인호, 56, 한국생활환경연구원 본부장), 언니(김정희, 48, 반야월 김정희 약국)들 모두 훌륭한 사회인이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도시 아이들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잘 무너집니다. 저는 시골 흙내를 맡고 자라서인지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습니다."

◆ 故 이휘소 박사의 연구실에서도 일해

사실 대학에 진학 할 때만 해도 김박사는 평범했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다니면서도 처음에는 노래 춤 농악을 즐겼고 탈춤동아리에서 신명나게 놀았다. 고대 선후배 사이의 끈끈함에서 인간관계의 기본을 배웠다.

"이때의 경험이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어요."

미국 로체스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96년 버클리대의 동양인 사상 첫 정교수로 발령을 받았고, 지금은 미국 테바트론을 이용한 충돌연구를 하는 미국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CDF 공동대표로 전세계 과학자들과 연대하면서 질량의 기본이 되는 입자로 여겨지는 힉스입자의 존재를 검출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페르미 연구소는 박정희 정권의 밀명을 받아 핵폭탄을 제조하려다 암살당했다는 내용을 담은 김진명의 추리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벤자민 리)가 이론물리학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던 곳.

"제가 미국에 갔을때는 당시 미국과학계의 스타였던 이휘소 박사님은 타계하셔서 뵙지는 못하고 그 연구실에서 일했죠."

◆ 우주 생성원리 밝혀낼 '충돌의 여왕'

김박사가 전세계 12개국 850명의 '알아주는 '과학자들이 모인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CDF의 무기명비밀투표에서 뜻밖의 공동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대학교때 닦은 리더십과 봉사정신이 밑거름 역할을 했다.

원래 무용수가 되고 싶었던 김박사는 "고대 나고, 탈춤 김영기났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탈춤꾼(?). 그러다가 스터디그룹을 결성하면서 엄청난 집중력으로 공부에 몰두했고, 대학 4학년때는 전공인 입자물리학에 빠져들었다.

"가속기에서 입자가 충돌할 때 생성되는 힉스입자를 관찰하는 것이 제 연구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직까지 관측은 안됐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힉스입자가 검출되면 질량의 근원이 밝혀질뿐더러 현재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믿어지는 암흑물질의 실체를 밝히는데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따라서 힉스입자의 검출은 세계 과학계의 초미의 관심사.

◆ 고체물리학자 남편의 헌신적 외조

"가속기는 우주탄생의 초기인 빅뱅 직후의 상황을 재현하는 장치입니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던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1초에 백만번 충돌시키면 엄청난 에너지를 내며 소멸합니다. 이때 새로운 입자들이 생성되는데, 저는 이 힉스입자를 관찰해서 우주생성의 비밀을 풀려는 것입니다."

미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CDF의 공동대표로 국제적인 과학연대와 협조를 끌어내는 김박사는 몇 년전 결혼한 남편(시드니 네이글)의 헌신적인 외조를 받고 있다.

누대로 교수집안에서 태어나 본인 역시 미 시카코대 교수이자 저명한 고체물리학자인 남편 시드니는 "나보다 더 훌륭하고 바쁜 사람"이라며 아내의 식사 준비는 물론 빨래까지 다해준다.

늘 웃으며 순수하게 학문을 사랑하는 김박사가 자신을 과학의 세계로 이끌어준 모교와 긍정적인 인생관을 심어준 고향의 부모님 그리고 학문의 동반자이자 가정을 지켜주는 남편의 도움으로 정말 환상적인 충돌을 일으켜 우주의 비밀을 밝혀낼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imaeil.com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jhchu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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