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주도했던 대항해 시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두 나라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탐험 지역에 대해 소유권 분쟁이 생겨났다. 특히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분쟁의 소지가 더욱 커졌다. 포르투갈이 1480년 에스파냐와의 조약, 교황의 칙서를 통해 기니와 보자도르 곶(대서양 카나리아 제도 아래) 남쪽 지역의 모든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이 문제 해결을 부탁하자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역사상 최초로 기하학적인 해결책을 교서로 발표했다.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400km 지점을 경계선으로 서쪽 지역의 발견지는 에스파냐가, 동쪽으로는 포르투갈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됐다.
1494년 6월 7일에는 양국이 이를 기초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다.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고, 아프리카 항해를 위한 충분한 활동무대를 가질 수 없다는 후앙2세의 불만을 받아들인 후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기준선(교황자오선)이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1천780km 이동한 위치로 옮겨졌다. 이 조약은 포르투갈이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발견한 브라질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됐고,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강대국 사이의 충돌을 막은 평화적 해결책이었지만, 그들 만의 이해관계 속에 수많은 식민지인들의 고통이 예견되는 순간이었다.
▲1456년 조선 사육신 박팽년 사망 ▲1920년 대한독립군, 봉오동 전투 승리 ▲1982년 5개 시중은행, 공동으로 신용카드 발급 개시.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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