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바람의 전설'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매혹적인 음악과 춤은 상쾌함을 넘어 도취감에 이르게 한다. 남들은 '제비족'이라고 비난하지만, 자신은 '사교댄스'를 추는 무도예술가라고 말하는 주인공 박풍식. 제사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진짜 '제비'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권태로운 삶에 짓눌려 지내던 박풍식은 우연히 춤을 알게 되면서 활력을 되찾는다. 첫 스텝을 밟는 순간 온몸에 퍼진 전율로, 미친 듯이 춤에 빠져들었고, 진정한 춤꾼에 대한 열망 하나로, 춤의 고수들을 찾아 전국을 떠돌며, 도를 닦듯 춤을 연마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막상 춤을 출 곳이 없고, 열악하지만 캬바레를 찾게 되고, 돈이야 파트너들이 주기에 받았다. 내숭이나 떨며 세속적 욕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동기와 순수 의지에 따랐을 뿐이라고 한다.

반면 진짜 '제비' 김만수는 서툰 지루박 스텝으로 과욕을 부리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타협형성에 실패하면서 교도소를 들락거린다. 마치 신경증적 증상이 형성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박풍식도 김만수와 다를 바 없는 추하고 타락한 욕망의 노예일 뿐이라고 여긴다. 정말 박풍식은 개인적 책임의식과 죄의식이 결여된 비난받아야 할 바람둥이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소외당하고 평가절하당한 자유주의자의 초상일까.

1954년 교수 부부의 일탈과 애정행각을 다룬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춤바람과 성 윤리에 대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듬해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는 사교댄스의 명수로 군림하며, 춤만 한 바퀴 돌고 나면, 여자들을 거의 내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두 사건은 서구 자유주의 물결을 소화해가는 우리 사회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고, 한편으로 사교댄스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심화되어 댄스 열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남녀가 만나 야릇한 조명 아래서 음악과 춤을 즐긴다면, 동기야 어떻든 '남녀상열지사'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박풍식에게 춤은 현실이자 실존이며, 오히려 현실은 그에게 매트릭스 같은 가상현실일 뿐이었다. 인간이 춤을 추는 진짜 이유는 신체로 자신을 표출하여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남과 같지 않다는, 즉 다른 존재와 확실히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이나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식하는 의미일 수 있다.

외국 영화처럼 넓은 홀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왈츠를 추는 꿈을 꾸었지만, 그런 여건은 불가능하였고, 그래서 캬바레를 찾았고, 그 다음부터는 제비족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말에 박풍식은 경찰서장 부인 농락죄로 체포되고, 그의 춤 스승들처럼 나중에는 알코올 중독자로 세월을 보낸다. 개인의 순수의도가 다수 대중의 몰이해로 매장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의사로서 소신껏 진료를 해왔다고 여겼는데, 제비족 같은 소수에 의해 모든 의사가 파렴치한 집단으로 분류되어 매도당할 때의 자괴감의 경험은 박풍식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누구나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아서, 섹스, 스포츠, 댄스, 도박, 사이비 종교 등으로의 도피가 많다. 이런 대중적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고 개인과 사회의 정신병리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를 '사회정신의학'이라고 한다. 이혼 문제, 가정 파탄, 가정폭력, 성폭력, 대중문화 등 사회적 문제를 정신의학적으로 다루는 분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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