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까지 불투명했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이 17일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북한 당국은 6·15 민족통일대축전 마지막날인 이날 오전 남측 정부대표단의 평양 출발 직전에 정 장관을 면담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뜻을 전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정 장관의 면담을 받아들인 것은 몇 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현재 중대국면에 처한 북핵 문제와 지난 1년여 동안 중단 상태에 있었던 남북 당국 간 관계의 향방과 관련해서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이 성사됐다는 것은 우선 북핵 문제와 관련해 김 위원장이 모종의 전략적 결단을 굳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낳고 있다.
그동안 부시 미 행정부의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 정책의 흐름을 예의주시해오던 김 위원장이 지난 10일(현지시간)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불용과 함께, 평화적·외교적 해결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핵포기시 대북 체제안전 보장과 실질적인 에너지·경제 지원, 북-미간 '보다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나갈 의향이 있음을 밝힌 것을 계기로 6자회담을 통한 해결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관측이 맞을 경우, 김 위원장은 이날 면담에서 정 장관에게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의지를 피력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점쳐진다.
물론 그렇지 않고 정 장관이 전하는 노 대통령의 메시지를 조용히 경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노 대통령의 친서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정 장관이 전달했을 노 대통령 친서의 구체적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도 주목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가부간에 전략적 결단을 앞두고 우리 정부를 통해 미국의 정확한 입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지금이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고 한미정상회담이후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정 장관을 만나 자신들의 입장을 나름대로 정하기 위한 장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 정 장관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과 함께, 부시 미 행정부의 시각과 입장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가 조·야 일각에서 여전히 대북 강경책이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평화적·외교적 해결'로 확실하게 가닥을 잡았을 뿐 아니라, 6자회담 재개시 실질적인 협상에 임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김위원장의 '통크고 현명한' 결단을 진지하게 설득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정 장관은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한 노 대통령의 '구상'을 설명하는 한편,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이번이 어쩌면 평화적 해결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날 면담 내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김 위원장이 정 장관을 만나준 것 자체가 앞으로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김 위원장이 6자회담 복귀와 관련한 구체적인 언질을 주었을 경우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한 6개국간 외교노력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작년 7월 고 김일성 주석의 사망 10주기 조문 불허와 탈북자 집단입국 사건, 미의회의 북한인권법 제정 등을 계기로 10개월여 중단됐던 남북 당국간 관계가 단순한 원상회복 수준을 넘어 거의 최고위급 수준으로 복원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정 장관의 평양 방문은 단순히 통일부 장관의 방북이라기보다는, 우리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를 총괄하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사실상 노 대통령의 특사 역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하는 정부대표단의 카운터 파트를 우리 측의 예상과는 달리 김기남 조선로동당 중앙위 비서로 격상시킨 것이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6일 정 장관과의 단독면담과 환영만찬에서 극진하게 '환대'하는 등 이번에 북한이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것 등이 그런 분석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김 위원장과 정 장관의 면담은 무엇보다 5년전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상이 서명한 6·15 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고, 지난 5년간 북핵 문제 등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었던 남북관계를 다시 정상궤도로 올린다는 의미가 있다.
또 지난 2003년 2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 송금 특검을 계기로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신과 오해의 상당 부분을 씻어내고 정상 간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는 한편,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북한이 남한을 '의사소통로'로 인정,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남과 북이 좀더 주도적으로 협의해 나갈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남한이 진심으로 미-북 사이에서 북한의 이익에 반하지 않고 조금은 객관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북한이 바라는 바라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참여정부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한미동맹 틀에서 남북관계를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우리 정부의 의지를 김 위원장이 읽고 어느 정도 화답을 함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의 희망을 갖게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 결과가 어떤 내용이었을지 주목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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