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조와 함께

어둠을 갈고 어둠을 갈다 보면

검은 먹빛 속에 피가 스밀 때가 있다

백성의 타는 뜻일랑 붉은 먹으로 쓴다.

흰 창호지에 난도 산수도 붉은 빛깔이다

댓돌 위에 엎드려 삼 년을 울어도

왕조의 크나큰 아픔을 누가 값하랴.

갓 쓴 놈, 벙거지 쓴 놈, 패랭이 쓴 놈

푸줏간 고기는 모두 한 근씩이다

흰옷의 갈기를 세워 기를 올려라, 기를 올려라.

이근배 '주묵화'

실사구시의 다산 정약용은 백성의 타는 뜻을 보다 강렬하게 표출하는 방법으로 주묵화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어둠을 갈고 갈다보면 검은 먹빛 속에 피가 스밀 때가 있다고 진술한다.

이때 어둠은 백성의 한이리라. 그리하여 흰 창호지에 난과 산수마저도 붉은 빛깔이다.

그가 갓을 썼든, 벙거지와 패랭이를 썼든 푸줏간 고기가 모두 한 근씩이듯 하늘 아래 모두 평등하다고 목청껏 외친다.

기를 올린다는 것은 전쟁에서는 출전이다.

이즈음도 붉은 먹그림을 온몸으로 그리고 있는 이들이 적잖음을 지체 높은, 백성의 공복들은 늘 깊이 헤아려야 하리라.

이정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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