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술 먹은 사람같이 좀 왔다갔다 꼬라박지마.""세진아, 지금 드리프트 해라, 해.""오케이, 빠샤!"
지난 일요일 오후 3시, 땡볕이 한창 목덜미를 할퀴며 심술을 부릴 때였다.
여느 가정이면 외출을 했거나 조용히 낮잠을 즐길 시간. 그러나 박태식(34·대구시 서구 내당동)씨네 작은 방은 숨 쉴 새도 없이 왁자하다.
컴퓨터에 딱 달라붙은 박씨와 딸 현정(9)·세진(8)양 사이에서는 '외계인 대화'도 오간다.
무슨 일? 우리나라 사람 4명 중 1명 꼴로 즐긴다는 국민 게임 '카트라이더(kartrider)' 다.
현정이는 깔깔대다가 이내 발을 동동 구르고 박씨도 코치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게임에 매달리는 동안만은 모두 친구다.
엄마는 어디에? 거실에 있던 허미숙(34)씨 조금 심술이 난다.
게임에 소질이 없어 나왔지만 영 찜찜하다.
'딸 사랑은 아버지라지만…. ' 그래도 억울해 불러주지도 않았지만 슬그머니 들어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이내 쑥 빠져버린다.
금방 아이들 뒤에 바짝 붙어 "좀 더 달려라, 달려"라며 부추긴다.
박씨 가족에게 카트라이더는 레이싱 게임이 아니라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화목'이다.
하긴 8, 9세짜리 아이와 대화래야 별 것도 없겠지만 앞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과 좀 더 많은 대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지금부터 투자하는 셈이라고 친다.
'어릴 때부터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자라서도 쉽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이 박씨의 생각이다.
그거야 다 아는 것이지만 실천은? 그래서 박씨는 어떤 일도 대화로 풀어가는 미래의 화목한 가정을 그리며 시간여유가 있을 때 조금씩 조금씩만 투자를 하는 것이다.
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아이들 공부에 목숨을 거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 조금 불안할 법도 하다.
이에 대해 박씨의 생각은 거의 신념에 가깝다.
"게임을 적절히만 이용하면 아이들 공부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아이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늘 공부도 게임처럼 하라고 지도하는 만큼 집중력도 좋아지고…. 공부를 위한 당근으로 사용하는 거죠."
교육사이트 에듀모아에서 일하는 박씨는 어느 가정보다 자녀 교육에 똑 부러질 정도로 열성적이다.
큰딸 현정이에게는 호랑이 영어선생님이기도 하다.
카트라이더는 영어공부 끝에 나왔다.
퇴근후 밤늦게 영어를 가르치다보니 현정이가 꾸벅꾸벅 졸거나 지루해한 것. 결국 당근을 내세운 게 자신이 4개월 전부터 아이들 몰래 즐기던 카트라이더였다.
다른 게임에 비해 폭력적이지도 않고 한 게임당 2, 3분이면 충분하니까 아이들이 즐기기엔 딱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환영. 학교 친구들이 자랑하듯 게임이야기를 할 때 드디어 한 몫 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엄마도 처녀시절때를 기억하며 환영했다.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레이싱 게임을 좋아했어요. 오락실 가면 다른 것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오토바이나 자동차 경주는 곧잘 했거든요. 캐릭터도 깜찍하구요."
그 결과, 대성공이었다.
박씨는 "게임을 몇 판 하고 난 뒤 공부를 시키면 현정이 눈이 반짝거린다"고 맘에 들어하고 현정이도 "게임을 하고 나면 공부가 더 재밌어요"라며 맞장구다.
문제는 게임 시간에 대한 컨트롤이다.
박씨의 비법은 이렇다.
"20~30분으로 데드라인을 정해두고 아이들이 떼를 쓰면 협상을 합니다.
예를 들면 3판만 더 하기로 하면 대개 아이들이 지키더군요."
그러나 박씨 부부가 정말 기뻐하는 것은 카트라이더가 안겨준 가족사랑 때문이다
"같이 게임을 즐기다보면 금방 아이들과 친해진다는 걸 느껴요. 예전에는 아이들과의 대화가 그저 학교에서 생긴 일 정도로 한정돼 별 할 말이 없었는데 게임이 매개가 돼 고민거리나 집안 이야기 등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부인 허씨는 달라진 남편 모습에 신난다.
스타크래프트 광이었던 남편이 아이들과 카트라이더를 하면서 오히려 컴퓨터에 매달리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
"예전엔 남편에게 컴퓨터는 밤새 놀아주는 와이프였어요. 이제는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니 정말 이뻐보여요. 카트라이더는 하나의 생활의 재밋거리이자 우리 가족을 이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됐습니다.
"
박씨가 결론을 맺는다.
"세대 공감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얘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해지려면 사소한 거라도 아이들의 관심을 제대로 알고 어른이 먼저 다가가는 수밖에요." 전창훈기자 apolonj@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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