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학습에 관심 있는 학부모들 사이에는 '선행학습'이 일반화했다. 중학교 1학년 수학 공부를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미리 시키는 건 보통이 됐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심지어 5학년 때 중학교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도 있다. 자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학부모들은 한발 앞서 배움으로써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이웃에 자랑하면서 부모된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행학습, 엄밀히 말해 조기진도는 소수의 학생들에게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에게는 학습 의욕을 떨어뜨리는 독이 된다. 미리 배워서 알고 있다는 생각에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공부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난 4월 희망교육에서 조기진도의 문제를 일부 다룬 적이 있는데, 많은 학부모들이 과연 그러하냐고 의문을 표시해왔다. 실제 사례를 통해 과목별 문제점과 대책을 다시 한 번 짚어본다.
◇ 사례1
K군은 현재 고3이다. 가장 두렵고 자신 없는 과목이 수학이다. 그러나 K군은 중3 때까지는 수학이 늘 전교 1등이었고, 각종 수학 경시대회 학교 대표였다. 그런 K군이 지금은 왜 수학을 가장 힘들어 할까? 중3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과 그룹으로 고1 과정인 10-가, 나를 선행학습했다.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이 진도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개념 정리는 확실하게 하지 않고 문제풀이만 주로 시켰다. 고1 때는 역시 수Ⅰ, Ⅱ를 앞당겨 배웠다. 역시 진도에만 급급한 수업이었다. 주로 학원 선생님이 설명하고 문제를 풀어주는 것을 듣는 수업이었다. 고1 때 3학년까지 진도를 마쳤다. 고2 때까지는 그럭저럭 성적이 나왔지만 3학년인 지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초가 약함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다시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 사례2
B양은 지금 서울대 사회과학대 1학년이다. 고3 내내 모의고사에서 전체 15등 정도를 유지했다. 수학은 원점수로 100점 만점에 75점 정도 나왔다. B양은 수능을 한 달 정도 남겨놓고 전 과목 교과서를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언어와 사탐은 물론이고 수학도 교과서를 다시 정독했다. 과학과 수학은 중2 교과서부터 다시 읽었다. 특히 수학은 각 단원에서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을 깊이 있게 정독했다. 그 중에서도 확률 단원은 교과서의 설명을 여러 차례 읽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제도 다시 풀어 보았다. B양은 실제 수능시험에서 수학은 원점수로 97점을 받았다. 마지막에 교과서와 기본을 무시하고 어려운 문제집 위주로 공부한 많은 친구들은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B양은 수학 교과서의 설명 부분을 다시 읽은 것이 수능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실태와 대책
▲ 수학
학부모들이 선행학습의 필요성을 가장 느끼는 과목이 수학이다. 많은 공부가 필요한 만큼 일찍부터 진도를 나가면 나중에 수월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문제풀이 실력이 중요한 과목이 아니라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 과목이다. 한 단원의 기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에서 그 이상의 부작용이 발생한다. 교육과정에서 제시돼 있는 단원의 기본 개념은 학생들의 발달과 지적 수준에 맞춰 편성됐기 때문에 일찍 공부할수록 완전한 이해가 어렵다. 현재 배우고 있는 과정을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충분한 연습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학습 의욕은 금세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수학에 대한 흥미 상실로 이어진다.
수학과 교사들은 중3 때 고교 과정인 10-가, 나를 아무리 열심해 했다고 해도 고교에 진학해서 수학 점수를 잘 받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고1 때 수학Ⅰ'Ⅱ에 몰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학년에 맞춰 기초부터 충실히 다져놓지 않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배우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능시험과 연결시켜 보면 선행학습의 문제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기초가 부실한 학생, 문제풀이 위주의 패턴 학습에 익숙한 학생들은 수능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생소한 유형이나 실생활 적용 문제를 만났을 때 힘을 쓰지 못한다. 모의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다가도 실제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 상당수가 선행학습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 영어
영어의 경우 선행학습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기교육 열풍이 대단하다. 언제 어느 때 어느 부분을 배우느냐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선행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문법을 예로 보면 중학교 때 배우는 것을 고등학교에서도 배우고,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문법이 적용된 문장이 중학교 교과서에도 흔히 나온다. 문장의 수준이나 출제되는 문제의 난이도, 어휘 등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어린 나이에 외국어를 시작해야 2개 국어 동시 구사능력이 배양된다고 주장한다. 중'고교 정도의 나이에 시작하면 논리로 외국어를 배우기 때문에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기 교육의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생산성 측면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영어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 중학교나 고교 대 토익, 토플, 텝스 등에 무작정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과연 그만큼의 성과를 거두느냐에 대해 다시 한 번 평가해봐야 한다.
가령 하나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뜻뿐만 아니라 그 글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을 갖춰야 한다. 해석은 가능한데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능시험에 출제되는 영어 문제들이 갈수록 단순한 영어 실력 테스트가 아니라 언어 영역에 적용되는 풀이 방법을 원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 언어
언어는 과목 특성상 국어 교과서를 미리 가르치는 게 아니라 논술이나 글쓰기, 독서, 철학 등을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가르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학입시에서 독서와 글쓰기의 비중이 강화되면서 초등학생 때부터 지나치게 논리와 기법 중심의 교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전문가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어린이나 중고생을 상대로 철학이나 독서 지도를 하는 경우 학습자의 나이와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과 딱딱한 논리를 다루다 보면 독서나 사고가 주는 재미를 잃기 쉽다. 논리보다는 작품을 통해 감수성과 직관력, 상상력을 기르도록 이끄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간접 경험을 쌓게 되면 글 쓰는 요령을 배우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어려서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흥미를 붙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심층면접이나 논술에 대비하려면 평소 시사적인 쟁점들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접하고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들을 현실과 접목시키는 활동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 결론
선행학습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일부 우수한 학생, 그것도 특정 과목에 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미리 배움으로써 학교 수업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오히려 손해다. 게다가 처음 배울 때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내용은 이후 수업이나 학원 강의 등을 통해 아무리 보충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한 번 틀린 문제를 되풀이해서 틀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학부모의 욕심으로 자녀에게 지나친 강요를 하고 기대를 품는 것은 올바른 부모의 역할이 아니다. 꼭 원한다면 해당 학년을 마쳤을 때 자녀 스스로 선행학습에 대한 욕구를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때도 누구 집 아이는 어떻다는데 하는 식의 비교는 학습 동기를 자극하기보다는 의욕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기 쉽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사진: 선행학습은 많은 학생, 학부모들 사이에 당연한 일이 됐지만 자칫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진은 학원 수업을 받는 학생들.(기사 중 특정 내용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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