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조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라 한 점도 남기지 말고

부서져 어느 도공의 손끝에 다시 가 닿아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거라

어쩌지 못해 지녀왔던 못난 삶의 언저리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채

티끌로 먼지로 변해 흙으로 돌아가라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 있어도

풀잎 돋고 뿌리 내린 나무 밑의 한줌 흙으로

몇 억겁 바람이 불어도 그 세월 이기거라

그런 날 인연 닿는 어느 도공의 눈에 띄어

시린 마음을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거라

하순희 '그릇'

처음 변할 때 시의 화자는 '끓는 물'이 되기를 갈망한다.

고체의 액체화이다.

얼음과 같은 것은 이것이 가능하나 용암이 되지 아니 하고서야 어찌 그릇이 물이 될 수가 있을까.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결국 어떤 순수의 극치에 이르기를 희구한 것으로 인식된다.

여러 변용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이 지상에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기를 갈망한다.

이렇듯 '그릇'은 언어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실존적인 철학을 내재한 튼실한 시편이다.

존재론적 탐색이 돋보인다.

이정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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