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브뤼셀의 아침이 밝았다. 숙소 근처 대형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 슈퍼에 들어서자마자 밀려오는 이 행복감은 맛 본 사람들만의 것이다. 식당에서 괜찮은 한 끼 먹을 돈으로 슈퍼에 가면 대략 이틀치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맥주로 술배를 채우니 어찌나 흐뭇한지. 참치 통조림, 소시지, 맥주, 빵 등을 사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다.
야간기차 예약을 하러 북역으로 향했다. 아직 야간이동이 며칠 남았지만 벌써부터 열차 예약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만에 하나 자리가 없으면 일정이 차질을 빚는다. 그러면 예약된 호스텔에 가지 못하게 되고 내 생돈을 주고 숙박을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지.
야간이동 기차 예약을 무사히 마치고 본격적으로 돌아다니려는데 하늘이 서서히 시꺼멓게 변하더니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삽시간에 억수로 변했다. 숙소로 돌아가려다 브뤼헤로 가기 위해 중앙역으로 향했다.
브뤼헤 가는 기차를 타니 날씨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아온다. 그렇다고 패스 성격상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해서 브뤼헤까지 갔더니 브뤼셀보다 더 춥다.
첫 목적지는 반달양조장. 투어티켓을 사려는 순간 떼거리로 몰려드는 단체관광객들에 파묻혀 얼른 투어시간을 다음으로 바꾸고 브뤼헤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종루로 갔다. 올라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넓이 1m도 안 되는 계단 366개를 올라가서야 브뤼헤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꼭대기에서 본 브뤼헤 전경. 중세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현대식 건물 하나 없는 빨간지붕 일색인 전경에다 운하가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가히 벨기에의 '베네치아'라 할 만하다.
종루를 내려와 향한 곳은 300여 가지의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술집. 문 앞에는 '화요일은 쉽니다'라는 문구가 턱 걸려 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반달양조장으로 향했다.
반달양조장에 가서 투어를 하는데 다행히 영어로 설명한다. 1시간의 투어는 맥주의 제조과정, 세계의 맥주, 브뤼헤 주요 관광지 소개 등으로 이뤄졌다. 투어 가이드가 문득 날 보면서 "옥상에 일본사람도 꼭 가보라"고 한다. 난 바로 "I'm not Japanese. I'm Korean"이라고 소리쳤다. 정말 기분이 상했다. 세계 맥주를 소개할 때도 보니 일본, 중국 맥주는 있어도 우리나라 맥주가 빠져 있다. 맥주뿐 아니라 상점에 가면 일본 여행책자는 있어도 우리나라 것은 없다. 우리는 일본보다 잘난 줄 알지만 유럽에 오면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잘났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투어가 끝나고 맥주시음이 있다. 맥주의 생명인 거품을 적당하게 따라주는 기계. 정말 신기하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일행들과 돌려 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난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발효 과정에서 첨가물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듣기는 했지만 끝맛이 시큼해 새롭다. 한 잔을 다 비우고 다른 맥주를 찾아 카페로 갔다. 떠나기 전 아버지가 말씀해주신 'Duvel' 맥주를 마셔봤다. 알코올 도수가 일반맥주의 2배인 8.5도. 처음에는 별 차이를 못 느꼈지만 세 모금 정도 들어가니 머리가 아찔하며 금세 확 달아오른다.
다음날은 'Cantilton' 양조장으로 출발했다. 무척 후미진 곳에 있어 거리도 꽤 멀고 푯말도 좀 엉성했다. 이곳은 자유투어여서 혼자 찔레찔레 돌아다녀 보니 전날 반달 양조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입구에서 웬 할아버지가 와인처럼 맥주를 따라 준다. 색이 워낙 이상해 처음에는 맥주인지도 몰랐다. 과일을 혼합해서 맛을 냈다는데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고 매우 썼다. 참 신기한 맥주도 많아.
맥주 색이 신기해 몇 개 따라놓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청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찍고 싶으면 돈 내든지 아니면 양조장에서 나온 완제품으로 만들어진 병을 찍으라고 하기에 병을 세워놓고 찍은 뒤 나왔다. 점심 시간을 넘겨 한 음식점에 들어서니 점원이 무척 반갑게 맞는다. 상술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반겨주니 기분 좋다. 파리를 떠나 지금껏 날 반겨주고 아는 척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외롭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내가 유럽에 와 있다는 증거이고 이 기회를 통해 나 자신이 커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김상규(대구대 특수교육학과 3학년)
*후원:고나우여행사(www.gonow.co.kr, 053-428-8000)
사진: 1.브뤼헤 전경 2. 맥주공장 투어 중인 관광객들. 3. 전시된 세계의 맥주들. 아쉽게도 일본, 중국 맥주는 있어도 우리나라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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