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대구의 교통영향평가를 둘러싼 논란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취재팀은 최근 대구시가 '흥정'으로 조건부 가결한 황금네거리, 범어네거리 일대 주상복합건물들의 평가서를 바탕으로 '교평, 그 깊숙한 내막'을 들여다 봤다.
◇출발부터 불공정
교평은 출발부터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
지난 8일 5차 재상정 만에 대구시가 조건부 가결한 황금네거리 주상복합건물은 올 초 첫 교평에서 용적률 711.89%의 46층 지상 건물에 연면적 1만8천㎡의 지하 3층 규모 대형 할인점으로 심의를 받았다. 용적률을 적용받지 않는 지하에 대형할인점을 끌어들였고 용적률을 적용하는 지상건물도 분양가구수를 더 늘렸다. 이에 따라 똑같은 부지에서 교평을 통과했다가 수익성 문제로 곧 사업을 포기한 2003년 주상복합건물과 비교했을 때 교통발생량(하루 1만744대)은 평일 기준으로 2배가 훨씬 넘고, 용적률도 29.40%나 늘었다.
상식적으로 심의 위원들이 허수아비가 아닌 다음에야 교통발생량이 급격히 늘어난 이 같은 사업 계획을 통과시킬 리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억지를 부렸을까.
교평 보고서 작성 기관을 사업 시행자 스스로 선정하도록 한 '법'상 맹점 때문이다. 사업자에게서 돈을 받아 보고서를 만드는 평가 기관 입장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사업자의 입맛에 맞게 각색해야 하고, 무리한 요구라도 결국은 따라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하지만 출발부터 불공정게임을 하는 마당에 누가 교평을 신뢰할까. 출발만 제대로 했어도 황금네거리 주상복합건물은 5차 재상정까지 가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고, 심의 자체도 좀 더 심도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평가기관 한 관계자는 "교평 기준에 맞게 보고서를 작성해도 사업자가 바꾸라면 바꿀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필요 없는 재심의가 잦아지면서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구에는 6개 평가기관이 해마다 20~30개의 교평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건당 용역비는 아파트(6만㎡)를 기준으로 최소 4천~5천만 원 이상이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는 서울 사업 시행사들의 경우 서울, 수도권 평가기관을 선호하는 추세로 이 비중은 전체의 20%에 달하고 있다.
◇엉터리 교통량 조사
교평의 핵심은 교통량 조사다. 평가 기관들은 현재 교통량을 바탕으로 미래 교통 수요를 예측하고 개선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첫 심의를 실시한 범어네거리 주상복합건물 교평은 교통량 조사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당시 심의에서 교통이 가장 혼잡한 평일 오전 8~9시까지 황금네거리 지체도는 차량당 58.6초였고, 서비스수준은 D(혼잡한 상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보다 1년 2개월 전 대우트럼프월드의 교평에서는 똑같은 장소인 황금네거리를 두고 지체도 91.8초, 서비스수준 F(대부분의 운전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과도한 지체상태)로 조사했다. 한마디로 1년여 만에 이 일대의 교통상황이 나아진 것으로 둔갑한 셈이다.
범어네거리 주상복합건물의 교평은 누가 봐도 결코 수긍할 수 없다. 심의 결과 동대구역네거리, 범어네거리, 수성네거리 등 조사대상 20곳 모두가 엉터리로 밝혀졌고, 결국 사업자는 두 달 만에 교통량 조사를 다시 실시했다는 것.
평가기관들에 따르면 교통량조사는 그 자체로 많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
날씨, 계절, 방학, 휴일, 조사자의 조사 능력 등 수많은 변수가 숨어 있다. 하지만 평가기관들은 10~20개에 이르는 교차로 및 가로 교통량 조사를 하루, 이틀 만에 모두 끝내야 한다.
최대한 빨리 교평을 통과하고 건축 심의 및 사업 승인을 서둘러야 금융이자를 한 푼이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사업자로서는 제대로 된 교통량 조사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평가기관들은 범어네거리 주상복합건물은 '차라리 정직하다'고 말한다.
다른 많은 평가기관들은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면 비슷한 시기의 교평을 참조하거나 평균교통량을 인용해 숫자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있으나마나한 주변개발 계획
주변개발 계획은 교통량조사와 함께 미래 교통 수요를 예측하는 주요 잣대다.
하지만 이 역시 있으나마나다.
2003년 5월 첫 심의를 실시한 대우트럼프월드 교평의 주변 개발 계획은 황금아파트 재건축사업과 코아시스105 신축공사, 단 두 곳뿐이었다. 대형할인점을 포함한 황금네거리 주상복합건물이야 당시로서는 예측 불가능했다고 치자. 하지만 끊임없이 아파트가 올라오고 재건축 사업이 이뤄지는 수성구 일대에서는 2003년만 해도 황금동 우방 수성1차 아파트 재건축 등 10여 건이 넘는 크고 작은 사업들이 줄을 이었었다.
현재의 교평에서 주변지역 개발계획을 넣고 빼고는 순전히 업자 마음이다. 굵직굵직한 일부 사업들만 채워 놓을 뿐 중소 규모는 쏙 빼놓기 일쑤다. 많은 사람들이 난개발을 우려하는 동대구로 일대의 경우 주변지역 개발계획에서 빠지는 중소 사업들이 특히 많아 제대로 된 교통영향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 교평을 통과한 범어네거리, 황금네거리 주상복합건물들은 주변 지역에서 각각 25개와 22개의 개발 계획을 진행하는 것으로 조사한 뒤 이곳들만 미래 교통 수요 예측에 적용했다.
하지만 취재팀이 건설업체와 해당구청을 통해 분석한 결과 범어동, 수성동, 황금동, 만촌동, 중동, 상동 일대에는 공동주택 건설만 62건을 추진하고 있고, 추진 예정 지역도 17건에 이르고 있다. 결국 사업자의 주변개발 계획 조사는 엉터리였다는 것이 판명됐다.
이처럼 교평마다 주변지역 개발계획이 듬성듬성한 까닭은 명확한 개발 규모와 주변 범위를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로 지척인데도 주변개발 계획이 서로 다르다. 범어네거리 사업의 주변 개발 계획 22개 중 9개가 황금네거리 사업에 빠져 있었고 황금네거리 25개 중 12개가 범어네거리 사업엔 없었다.
평가기관 관계자들은 "교평은 길면 6개월이 넘게 걸리지만 주변 개발 계획은 한번 정해지면 조사시점 그대로 변함 없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기획탐사팀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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