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다 보면 보석세공을 하는 것 같아요. 선이 날카롭고 영롱해, 마치 보석 같지 않나요?"
국내에 흔치 않은 여성 스테인드글라스 작가 오수인(42)씨의 작업실에는 몇 개의 묵주와 낡은 성서가 놓여있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기도와 묵상, 그리고 성화 밑그림 작업에 보내는 오씨는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선 하나, 색 하나 허투루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란다.
"얼마 전 제 작품 중 36점을 골라 그림으로 완성했어요. 2006년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성화의 밑그림을 구상하는 데에만 2년이 넘게 걸렸으니, 하나하나 모두 기도로 얻은 자식 같은 그림들이죠."
작업실 벽면에는 이제껏 그가 그려온 성화 수십 장이 붙어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한 장면이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기쁘게 변주된다. 성서를 그만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 평소 성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처음 접한 것은 이국땅에서였다. 1996년, 대학시절 중단했던 미술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무작정 떠난 프랑스에서 만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납으로 이어붙인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전부인 줄 알았던 그는 프랑스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색 유리를 1m 이상 붙이고 깎아내 끝도 없는 색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 유리 가루를 성화로 형상화한 작품 등 너무나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세계는 당장 그를 매료시켰다. 그는"빛의 예술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자마자 별 망설임 없이 길을 정했다"고 회상한다.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2000년 귀국해 그는 정형화된 방법 대신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기법을 택했다. 색 유리를 납으로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유리 위에 붓으로 직접 색을 칠하는 것. 한 유리판 안에도 붓 터치가 살아있고 명암과 채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경북 및 경기도 성당 7곳에 작품을 선보이자 신자들은"가짜 스테인드글라스"라며 낯설어 했다.
그가 굳이 유리 위에 색칠하는 회화적 기법을 택한 이유는 뭘까."유리 위 붓질 하나하나에 빛이 투과되고 반사되면서 따뜻하고 영롱한 느낌을 전해줘요. 물감을 이용해 빛의 효과를 내기 때문에 조명이 없어도 부드러운 느낌이 납니다."
이런 특성을 살려 그는 최근 파스텔톤의 성화를 그렸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검은 선 안에 원색이 갇혀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깬 것. 단순하고 강한 작품에서 벗어나, 동양과 서양의 문양을 총동원한 섬세하고 환한 성화를 완성했다.
"예수님이 탄생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쁜 일인데요, 그걸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화를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제 작품은 좋아해요."
눈이 큰 예수님, 곱슬머리 아름다운 성모님 등 엄숙하고 비장한 성화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낯설다. 한 편의 동화 그림을 보는 듯한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성서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동화처럼 쉽게 다가갔으면'하는 오씨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것.
스테인드글라스를 하기 위해선 무거운 유리와 씨름해야 하는 체력은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여성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테인드글라스 작가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오씨는 여성의 따뜻한 감성을 살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요즘엔 스테인드글라스를 좀더 대중화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 중이다. 자신의 작품을 인쇄해 카드를 만들기도 하고 쉽게 소장할 수 있도록 작은 소품들도 만들 계획이다.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성화 관련 자료는 무조건 외국에서 들여오는 지금의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전 제작과정을 모아 책을 발간할 생각이에요."
또 10여 년간의 작업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올 연말 전시회도 가질 계획이다. "늘 성서를 묵상하고 기도하죠. '하나님, 제가 성화를 늘 이렇게 예쁘게 색칠하니까 제 인생도 예쁘게 색칠해주세요' 라고도 기도해요." 그가 꾸는 꿈은 영롱한 빛을 통해 하나씩 완성되고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사진·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