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밤 11시. 한 무리의 가족들이 지산동의 한 볼링장을 습격(?)했다. 모두들 이불 속에 파묻힐 무렵 웬 달밤에 볼링? 하지만 걱정은 확 붙들어매란다. 금요일 밤을 정신없이 보내도 토요일날 푹 쉴 수 있으니까. 주 5일제 덕분이다. 정재훈(38·대구 지산2동)씨 왈, 우리 모임의 역사는 금요일 밤에 이루어진다고.
볼링공을 하나둘 잡더니 네 가족은 어느새 볼링장을 휘어잡는다. 머릿수가 많으니 시끄럽기는 어찌나 시끄러운지. 조용하던 볼링장이 삽시간에 시장판으로 변한다. "파이팅""으랏차차"…. 볼링장 주인이 힐긋힐긋 째려볼 정도다.
그냥 볼링을 치기가 밋밋했던지 재훈씨가 문득 볼링비를 걸고 성(性)대결을 하잔다. 만장일치로 오케이. 하긴 야간 할인이라 많이 나와야 2만5천원 정도니까.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해가며 각자 숨겨진 실력을 뽐낸다. 서경민(34·여)씨가 터키를 하며 여성팀 중 나홀로 분투한다. 하지만 결과는 597대475로 남성팀 승. 그러자 박명희(33·여)씨는 "원래 이긴 팀이 게임비 내는 거야"라며 심술을 부린다.
◆초교 엄마들 모임에서 부부 모임으로
네 부부가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건 지난해 5월부터다. 용지초등학교 1학년 1반 엄마들로 모임을 가지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박계순(38·여)씨가 부부 동반을 제의하면서부터다. 그렇지만 막연히 모인다는 게 얼마나 서먹서먹한 일인가. 그래서 목표를 잡은게 일주일에 한번씩 야간 산행을 하는 것. 이름도 거창하다. '화산고(화요일 산으로 고)'. 하지만 화요일날 몇 번 야간 산행을 하다보니 다음날 출근으로 남편들의 부담이 여간 아니었다. 결국 선택한 날이 금요일 밤. 주 5일제로 바뀌니 금요일만큼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심재학(41)씨는 "이제 모임명을 금산고로 바꾸어야겠다"며 거든다.
이들 네 부부는 부지런히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1년 넘게 얼굴을 맞대다보니 정도 많이 들었다. 가장 무서운게 정이라고 이들은 이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변모했다. 경민씨는 "형편이나 환경이 비슷하다 보니 네 가족 모두 잘 맞다. 이젠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해준다"라며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올 정도라고.
◆골라 노는 재미가 있다
모임 초창기에는 동네 근처 용지산이나 앞산에 오르는게 다였다. 하지만 편식만 하면 질리게 마련. 이들은 같이 손잡고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영화도 곧잘 본다. 최근에 본 영화가 '말아톤'. 아이들을 끼고 다니니 주로 가족영화가 대부분. 하지만 때때로 어른들끼리 뭉칠 땐 액션 영화도 즐기는 편이라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경준호(38)씨의 자문을 구한다. 준호씨는 집에 영화 CD만 500여장이 될 만큼 영화광이라 영화 해설까지 도맡는다. 각종 운동도 이들 모임의 빼놓을 수 없는 주메뉴. 준호씨는 볼링, 재학씨는 당구, 재훈씨는 인라인스케이트에 한가닥씩 하다보니 자연스레 모임 행사로 이어진 것이다.
여름에는 하계 캠프라는 이벤트도 마련한다. 지난해 8월에는 무덤 옆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극기 훈련도 했단다. 김한행(38)씨는 "대구 인근 최정산에 갔을 때였어요. 아이들 담력도 기르고 한여름 밤 추억도 만들 겸 해서 선택했죠. 그 덕분에 아이들하고 무척 진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라며 그 때를 돌아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시대 남편들의 최고 변명 "피곤하니까…". 준호씨도 예전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말 한마디로 주말이면 TV 리모콘을 잡은 채 방바닥을 열심히 긁었으니 부부 사이의 대화가 잘 통할 리 없다. 활달한 성격의 부인 명희씨는 그런 남편이 답답하기 그지 없었지만 피곤하다니 어쩌랴. 그저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그렇게 주말을 흐지부지 보내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가족 모임에 어울린 뒤로 경씨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그 전보다 부부 사이에 대화가 부쩍 늘었어요. 평소 때 말 할 수 없었던 섭섭한 일이나 아이들 학교 문제 같은 걸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사랑이 다시 싹트는 것 같아요". 명희씨는 무척 흐뭇한 듯 웃음보가 터졌다. 하긴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인 경씨가 요즘 들어 사랑 표현도 심심찮게 하는거 보면 모임의 효과가 크긴 큰 모양이다.
재학씨는 "부부가 보통 10년 정도 살면 권태기가 오기 마련인데 이렇게 어울리다보니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아요"라며 거든다. 당연히 부부 싸움도 이젠 남의 얘기다. 과거에는 정말 사소한 것도 험한 분위기가 오고 갔는데 이젠 서로 눈치를 보니 싸울 일이 없다는 것.
한행씨가 차례. "예전엔 나들이를 가면 행선지 문제로도 다툼의 불씨가 되었어요. 하지만 이젠 서로서로 다른 부부들을 비교하니까 싸울 일이 없어졌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점도 큰 수확이다. "자주 어울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서로 본받는 것 같아요. 누가 깔끔하면 그걸 따라하게 되고요". 경민씨의 말에 이어 계순씨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준호씨는 마음이 넓어 좋고 한행씨는 좀 썰렁하지만 사대부집 양반같아서 좋고요". 그러자 당사자들의 얼굴이 붉그스레해진다. 아이들 교육 문제를 상부상조하는 것도 무시못하는 혜택. 명희씨는 "엄마들 만나면 얘들 공부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라요. 그러다 자신이 몰랐던 정보도 얻을 수 있죠. 과외도 같이 모여서 하니까 사교육비 부담도 덜고요".
서슴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들의 표정에서 모임을 통해 새로운 행복에 눈뜬 단란한 부부의 모습이 한아름 그려졌다. 전창훈기자 apolonj@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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