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본다는 것은

존 버거가 '보는 방법'이라는 현대의 고전을 출판한 1972년만 하더라도 인류는 이런 장면을 상상하지 못했다. 앙증맞은 물체가 괴상한 구조물을 벗어나 재주를 부리며 날아가다 고구마 덩어리 같은 바위에 부딪히고, 바로 이어 원추형의 포말 다발이 뿜어져 나오는 그 모습을 말이다.

병든 육신에서 피를 채취하듯, 대우주는 '생성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방자한 인간에게 한 줌 가검물을 내 놓고 말았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이 장면을 깜찍한 3D 그래픽으로 '감상'했다.

레지스 드브레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출판한 1992년만 하더라도 뉴욕 9·11 테러는 예견하지 못했다. 번영의 상징이 능욕당하는 처절한 광경은 볼거리가 궁했던 터에 모처럼 TV 화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엽기' 이미지로 기억에 남았다.

매체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지는 눈길을 끄는 구경거리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미지의 범람은 우리를 불감증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우주 한구석에서 인간의 자만이 대우주의 섭리에 생채기를 내든 말든, 저 멀리 떨어진 맨하탄에서 초고층 건물이 비행기에 무너져 생떼 같은 사람들이 파묻혀 죽건 말건, 현실은 이미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여과되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버거나 드브레와 같은 이미지 연구의 대가들이 걱정했던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판단과 감각을 테크놀로지에 맡겨버리는 '기관 없는 신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보는 일이란 구체적인 행위, 직접적인 경험을 발생하는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오늘도 범람하는 저 수다한 사건, 사고의 이미지들을 본다는 것은 현실의 뒷면을 같이 겪고 아파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박일우 계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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