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8년 전의 일기(日記)

1977년 봄 어느 날 고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 일기장(日記帳)에 이런 글을 남겼다.

4월19일(화) 맑음

'저녁 7시30분 영등포 지구에 있는 청소년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을 시찰하다…영등포 공업고등학교, 영등포 여자상업 고등학교, 대방 여자중학교를 구로공단 이사장 안내로 둘러보았다. 직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이지만 다들 머리를 학생형으로 단정하게 다듬고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귀엽고 대견하다기보다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었다.

가정적으로 빈곤하다는 죄 하나만으로 남과 같이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택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학생복으로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나는 왜 학교를 못 가느냐고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도 하고 부모와 가정을 원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제 한스럽던 소원이 성취되었다. 야간이나 주간이나 자기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고 보람을 느낀다 했다. 이 학생과 교사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다.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마음속에서 기원하였다.'

28년 전 그분이 돌아본 구로공단'대방동 일대는 수출산업 역군들의 일터였다. 국민 1인당 GNP가 고작 82달러 였던 가난한 조국을 구하는 길은 기술 입국과 과학 교육뿐이라는 신념으로 낮에는 공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더 배우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마련해 준 뒤에 그 감회를 일기에 남긴 것이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그의 일기 속에 묻어나는 신념에 찬 교육관과 학생과 교사에 대한 절절한 애정,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줘야 할 것인가라는 진지한 지도자로서의 고뇌를 엿보면서 새삼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미래 지식산업을 예견했고 연민의 마음으로 인재를 아꼈고 교사를 존중했으며 무엇보다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감을 시책과 실천으로 내보였던 그의 기술인재 교육정책의 결실이 오늘날의 포항제철과 삼성전자를 있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정치가 죽을 쒀도 그나마 끼니는 잇고있다. 한주 내내 논술시험 하나 놓고 서울대 교수들과 입씨름이 붙어 티격태격하는 개혁 정권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박정희의 그림자도 밟을 자격이 없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학과 교수를 '손보고' '조지고' '진압'하겠다는 지극히 비교육적인 언어로 매도하는 수준의 사람들에게서 과연 얼마나 교육적인 정책과 대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잖아도 한국 대학 교육의 경쟁력은 세계 52위다. 대학 교육 이수율은 세계 4위 이면서 경쟁력이 꼴찌에 가까운 것은 대학과 대학생은 많은데 대학 교육의 질과 성과는 낮아서 대학을 나와도 기업 등에서 당장 써먹을 만한 기술력이나 지식 능력도 제대로 갖춰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다.

특히 인문계는 전공 분야와 관계 없는 직장에 취업하는 비율이 54%나 된다. 인문계 대학졸업생 절반이 4년 동안 수천만 원 들여가며 전공한 학과는 내팽개치고 헛공부하고 있는 나라에 무슨 박정희 시대 같은 기술 입국의 미래가 있겠는가. 교육은커녕 민생도 못 챙기는 정치권과 자존심만 살아 있는 듯한 대학이 입씨름과 기싸움하는 동안 전기료를 못 내 촛불 밑에서 공부해 오던 여중생이 불에 타 죽고 있다. 야간학교 수업에도 안쓰럽고 눈시울을 붉혔던 박 전 대통령이 통곡을 할 일이다.

하기야 정치권만 탓할 일도 아니다. 서울대 등 세칭 일류 대학 쪽도 가슴에 손을 얹고 대학 교육과 학생들, 한국의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한다. 전국에서 최고 수준의 인재들만 가만히 앉아서 골라 뽑아 가 놓고서도 세계 100대 대학에도 못 끼고 졸업생(이공계) 만족도 조사에서 교수 강의 부문은 53점밖에 못받은 건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이제 확 바뀌어야 할 것은 입시제도가 아니라 교육 자율성에 딴지 거는 입 거친 정치권과 교육 경쟁력은 꼴찌수준으로 떨궈 놓고도 계속 일류 신입생 뽑아다 반풍수 만들어 내보내는 식의 대학 쪽 마인드다.

입으로만 제 잘난 사람들은 28년 전 옛 지도자의 일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비록 낡은 일기장이지만 그의 일기 속엔 적어도 우리 교육의 가야 할 길과 정신, 지도자의 모습만은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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