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중요성을 정부 차원에서 검토한 것은 신라 신문왕 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구토(舊土)를 포함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한쪽에 치우쳐 있는 수도 경주를 대신해 땅이 기름지고, 교통이 편리하며, 경관이 아름다운 대구를 천도 후보지로 선택했던 것이 그것이다. 기득권층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떻든 대구의 중요성을 신라의 집권층이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15세기 초 군(郡)으로 승격되기까지 대구는 오늘날 최하위 행정단위인 읍, 면에 해당하는 현(縣)에 불과했다. 세조때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고,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하면서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감영(監營)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비로소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전국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 8도 중의 1개 도일 뿐 여느 도의 감영 소재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구가 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고부터이다. IMF사태에서 보았듯이 선조들은 이미 100년 전에 외채의 해악을 알았다는 사실 이외 나라의 빚을 조세가 아니라 국민의 성금으로 갚자는 국민운동이자, 사상 초유로 남녀노소,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 민족 전체가 참여한 구국운동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3·1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 그 모태라고 생각한다.
당시 다른 지역사람들은 '다 같은 조선 사람이자, 나라사랑하는 마음도 같을 진대 왜 우리가 이 운동을 주도하지 못하고 대구사람들에게 빼앗겼을까'하고 후회했을 만큼 대구시민들의 자존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은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이 된다. 21세기의 첫해이자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발전의 밑거름이 된 4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별다른 이벤트도 없이 아쉽게 보낸 것을 생각한다면 대구의 위상을 높인 2007년은 온 시민이 자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들의 시정 참여가 시정의 요체라면 시정부는 시민들의 결속력과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이 해를 의미있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달구벌얼찾기모임 대표 이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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