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편지-객관식의 그늘

서울대가 발표한 '통합교과형 논술고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서울대가 논란의 중심에 놓인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아직 구체화하지도 않은, 2년 반 뒤에나 치러질 대학의 선발전형 계획에 대통령과 정치권까지 나섰다는 건 좀 심하다 싶기도 하고, 허투루 봐 넘길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문득 옛 과거(科擧)는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시를 짓고 글을 쓰는 여러 과목의 시험이 있었다지만, TV나 책에서 본 풍경대로라면 몇 년 동안 쌓아온 실력을 한 줄의 과제(科題)에 담아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그리고는 이런저런 설명도 없고 점수도 없이 합격자 이름만 적힌 방이 붙기를 기다려야 한다. 낙방했다고 해도 자신의 실력 부족이나 불운을 탓할 뿐 왜 그런 문제가 나왔는지, 내 점수가 얼마나 돼서 떨어졌는지 항의하는 이도, 따지는 이도 없다.

그렇게 온전히 선발자 위주의 논술고사이던 과거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 떠내려갔다. 일제 강점기 때 고등문관시험이나 해방 이후 고등고시가 있었지만, 본격 근대화에 따라 급증한 국가'기업의 인력 수요와 뜨거워진 대학 진학열은 우리 시험제도를 응시자 위주의 객관식이라는 틀로 몰고 갔다. 채점이 빠르고 결과가 분명해 누구라도 쉽게 승복할 수밖에 없는 제도가 필요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빠른 시간 안에 주어진 보기 가운데서 정답을 골라내는 시험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란 대량생산 시대에나 맞는 것이다. 창의력과 사고력이 지배하는 지식산업사회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 폐해가 기업에서, 산업현장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시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객관식이 지배하는 구조에 길들였다는 사실이다. 사지선다형 시험의 결과라면 0.01점 차이의 탈락에도 이내 승복하지만 주관식이나 서술형'논술형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하고 여차하면 항의하는 풍조를 만든 것이다.

논술고사만 봐도 그렇다. 그럴듯한 취지로 도입했지만 초기에는 대부분의 대학들이 기본 점수를 대폭 줬기 때문에 수험생들의 점수 차이는 미미했다. 그 배경에는 수능시험이라는 변별력 있는 전형요소가 있었다. 공연히 점수 차이를 크게 했다가 항의받기 십상인 논술고사는 결국 10여 개 대학만이 치르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논술 때문에 당락이 뒤집혔다는 얘기는 남은 대학들이 여기에 변별력을 둠으로써 생긴 일이다.

2008학년도 입시에서 논술고사를 새로 치르거나 반영 비율을 높이겠다는 대학들이 잇따르는 건 수능시험의 변별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고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객관식에 익숙한 국민들에겐 대단히 위협적이고 의심스럽게 비친다. 대통령이 서울대를 미워하건 말건, 정치권이 서울대를 길들이려건 말건, 내 자식은 서울대에 보내고 싶은 보통의 국민들로선 불안하고 답답한 것이다.

교육부가 당초 선선히 동의했던 서울대의 통합교과형 논술고사에 정치권이 갑작스레 쌍심지를 돋운 데는 국민들의 이런 심리를 극대화하고 지지를 끌어들이려는 혐의가 엿보인다. 수능시험 1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되풀이된 '통합교과형'이라는 용어조차 공교육을 파괴하려는 발상으로 몰아가는 앞뒤 바뀐 논리에는 기가 막힌다. 어쩌면 이들이 객관식 시험제도의 폐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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