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멍청하거나 사기이거나

인터넷 실명제를 하잔다. 정보통신부 생각이다. 욕설과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그로 인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이 빈발하는 온라인 정화를 위해. 이제 욕하려면 이름표 달고 하라는 소리다. 이 문제를 이름표 달아 해결하겠다는 발상인데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옆반 담임선생님은 고운말 쓰기를 무척 중시했다. 그는 매일 반 아이들로 하여금 그날 하루 욕 한 아이들의 이름을 종례시간 적어내게 했고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된 아이는 앞으로 나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통렬한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얼마 후부터 누구의 이름도 제출되지 않기 시작했고 그는 기뻐했으나, 그의 폭력적 언어정책이 실제 성취한 것은 반 아이들 담합 능력의 현저한 상승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정작 배워야 했던 건, 욕은 나쁘다는 순결한 언어관이 아니라 욕을 해도 되는 상황과 해선 안 될 경우를 구분할 판단력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욕을 해서가 아니라 그 타이밍이 적절치 않아 생긴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은 고운말 쓰기 능력을 배양한 게 아니라, 사실은 시의 적절한 언어구사의 학습기회를 박탈당한 거였다. 이리저리 오사용하여 때론 철철 흐르는 코피를 비용으로 지불하며 터득해야 할 그 '때'에 대한 감각을 아예 말살하려 했던 꼴이다.

그렇다고, "주 평균 2회 한 달 이상 연속 회동해야 '친구'라 할 수 있고 그 관계에 한하여 '야이, 새끼야', '에이 씨바' 외 교육인적자원부가 정하는 5개항의 욕설을 허용하며, 미지인에게는 경부압박에 따른 호흡곤란 혹은 근골격계 외상에 노출될 위험이 상당 정도이므로 지정욕설도 그 사용을 엄금한다"며 법으로 그 학습기간을 관리하겠다면 그 또한 코메디고.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그에 따른 소통 규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다. '안녕하세요'가 하루아침에 첫 인사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게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환경이 등장했다.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법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 생소한 환경 앞에 우리 모두는 초등학생이 됐다. 욕을 처음 배워 써먹을 때처럼. 당연히 코피도 터진다. 그러자 담임이 나선다. 모두의 가슴팍에 이름표를 달아 고운말 쓰도록 하겠단다.

거짓말이다. 포탈과 주요 사이트들, 이미 실명가입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익명의 발언수위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규모고, 장소다. 과거 소통방식은 한 사람이 다섯을 상대하고, 다시 500명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5천이고, 5백만이다. 참여비용도 제로다. 동시성이 확보된 대규모 담론현장은 집회가 유일했고 참여는 현장에서만 이뤄졌다. 지금은 어디서건 손가락만으로 동참한다. 이제 권력은 마우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장은 누구나 드나드는 광장. 공공연한 광장에서의 대규모 압박, 이게 처음 겪고 있는 사회적 긴장의 뿌리다. 대상이 되는 자는 이걸 못 견딘다. 이 새로운 군중을 최루탄 대신 이름표 달아 해산시킬 수 있을 거라 믿는 게 실명제고.

우리가 아직 '백성'일 적 개인과 근대를 발명한 서구처럼, 새로운 주체와 질서를 발명해 역사의 표준으로 세계에 내놓을 기회다. '개똥녀' 사건은 새로운 유형의 인권침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식의 규범이 탄생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빅브라더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옆 사람이 사회규제의 출발이자 종착이 되는. 이걸 담임이 나서 이름표로 관리할 수 있다 믿는 건 욕설을 법으로 관리할 수 있다 믿는 것만큼 우매하다.

실명 몰라 인권보호 못하는 거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렇게 욕설 자체를 통제하겠단 발상이 아니라 '때'를 구분할 가치 판단 능력이다. 인간과 아바타를 구분하는 유치원 교육부터 시작할 일이다. 이걸 이름표 달아 해결하겠다는 건, 멍청하거나 혹은 사기이거나.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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