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간이역

전쟁으로 인생 행로가 엇갈린 두 남녀의 애잔한 사랑을 그린 영화 '해바라기'의 백미는 끝도 없이 펼쳐진 우크라이나 평원의 해바라기밭이다. 그리고 또 한 장면, 소식 끊긴 남편을 찾아 먼길 떠난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마주친 현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이 이미 딴 여인의 남편이 돼버렸다는 사실. 허겁지겁 플랫폼으로 달려온 남편, 그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기차에 뛰어올라 눈물을 쏟는 여인. 남자의 눈 앞으로 긴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기차의 뒷모습'''.

비행기, 자동차, 버스, 배, 기차 등 온갖 교통수단 중에서도 기차의 자리매김은 독특하다. 숱한 예술작품 속에서 기차는 항용 떠남과 이별, 그리움의 이미지로 남는다.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 '죽도록 외로우면 기차를 타라'는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마따나.

누구라도 가끔은 불현듯 기차를 타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것도 고속열차가 아닌 느림보 기차. 시골 아지매들의 오리지널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리는, 촌로가 5일장에서 사온 닭이 푸드덕 소란을 피우는, 그런 기차를 타고 돼지감자꽃과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시골역에 훌쩍 내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더 빨리!' '더 더 빨리!'를 외치는 시류 속에 잊혀가는 시골 간이역들. 요즘 들어 이런 간이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는 모양이다. 전국 곳곳의 이름 없는 작은 역들을 찾아나서는 사람들. 이들은 승객이 줄어 헐릴 위기에 처한 간이역들을 살려내는 지킴이 역할도 한다. 우리 지역의 지천' 고모역 등엔 간이역 시비(詩碑)도 만들어져 있다.

속도가 미덕인 이 시대, 간이역을 찾아나서는 그들은 말한다. "그리움을, 추억을 찾아서"라고. 하지만, 고속철의 등장과 통일호의 퇴장으로 간이역들은 점점 빨리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명맥만 잇고 있는 간이역들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판이다.

간이역이 사라지면 우리네 추억들도 하나둘씩 사라지지 않을까. 어디서고 훌쩍 내릴 수 있는 간이역들이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싶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뒤돌아보면 옛 역은 사라지고/시래기 줄에 얽혀 살던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박해수 시 '고모역' 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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