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폐인'의 시대

재작년, TV드라마 '다모'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술이나 마약 등으로 망가진 폐인(廢人)이 아니라 특정 대상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 즉 '사랑할 폐'자가 든 폐인(嬖人)이다. '다모' 신드롬 이후 '폐인'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유행 돌풍이나 핫 이슈 화젯거리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자들에게 어김없이 붙고 있다.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폐인의 원조격인 '드라마 폐인'은 특정한 드라마를 본방'재방'다시보기까지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보고, 드라마 내용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애원과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다모 폐인' 이후에도 '미사 폐인'(미안하다 사랑한다),'발리 러버'(발리에서 생긴 일),'파리 폐인'(파리의 연인),'부활 폐인'(부활) 등 새로운 폐인족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세간의 최대 화젯거리 중 하나인 '내 이름은 김삼순' 폐인들도 '3344'(삼순이와 삼식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재미난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게임에 푹 빠져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게임 폐인', 눈에 보이는 족족 디카로 찍어야 하는 '디카 폐인', 누가 뭘 물어보면 해답을 알려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래서 공부를 해서라도 알려 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식인 폐인'도 있다. 하루종일 홈쇼핑 TV를 보는 '홈쇼핑 폐인', 인터넷에서 온갖 분야의 자료를 척척 찾아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다운 폐인', 컴퓨터를 안고 사느라 그야말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면식수행(麵食修行)에다 낮엔 자고 밤이 되면 눈이 초롱초롱해서 움직이는 주침야활(晝寢夜活)의 '컴 폐인', 인터넷을 서핑하며 이글 저글 보는 족족 댓글 다느라 바쁜 '리플 폐인', 심지어 그저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냥 폐인' 까지 각양각색이다.

보들레르 시의 한 구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를 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쉬지 않고 취하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그대가 좋아하는 것에"의 '취하라'는 말 역시 좋아하는 것에 미쳐 살라는 의미이고 보면 요즘의 폐인과 일맥상통한다.

폐인족(族)들은 열정적이다. 관심 대상에 대한 애정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뜨겁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상에 관한 정보력과 전문 지식, 노하우도 빵빵하게 갖추고 있다. 소통 경로가 대부분 TV와 인터넷이라는 점에서 폐쇄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긴 하지만….

폐인족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한 코드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조금은 별나고 괴짜스럽고 수다스럽지만 귀엽기도 한(?) 그들이다. 마치 색깔도 무늬도 제각각인 조각천들이 이어져 멋진 퀼트 작품이 되듯 우리 사회를 다양성으로 물들여 준다.

이런 가운데 요즘 들어 갈수록 거대한 세력군을 형성하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부동산 투기에 미친 사람들. 물 좋은 곳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는 '절대 후각'을 갖고 있어 밥 먹듯 집과 땅을 사고 팔며 부를 불려 나가는 자들이다. 도시 지역의 10명 중 6명, 서울에서 사는 10명 중 7명이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한쪽에선 각종 편법을 동원한 투기가 활개를 치고 있다.

남에게 해악을 끼치고 나라 경제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암 세포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정부가 그토록 끊임없이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을 쏟아내는데도 약발은커녕 더욱 극성을 부린다. 그야말로 식어 빠진 쇠를 두드리는 것과 같고 사막에서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갈수록 무엇인가에 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 기왕이면 자신도 행복하고 남들도 더러 웃게 만드는 사랑할 폐(嬖)자 '폐인(嬖人)'들이 많아졌으면 싶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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