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승자의 재앙

요즘 '블루오션'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관련 기사들도 많이 나온다. 경쟁자와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걸 '레드오션', 그런 싸움 대신에 새로운 가치 창출로 경쟁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걸 '블루오션'이라고 부르면서 '블루오션'을 한 수 더 높게 평가하는 식이다.

'블루오션'이 '레드오션'보다 낫다는 건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기업들은 '레드오션'에 매달리는 걸까? 이 물음은 제기되지 않고 있다.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조금은 풀릴지 모르겠다.

'레드오션'은 '승자의 재앙'을 낳는다. 둘 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이종격투기의 상처뿐인 승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다. 골병 들고 나서 승자가 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 그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그런 식으로 골병 들어야 한다면 그게 바로 '승자의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한국정치의 최대 비극은 '승자의 재앙'이다. 사생결단식 선거로 인해 이긴 후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져야 할 책임이 '재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경우엔 '과도한 꿈'을 남발한 것이 노 정권을 늘 전투적인 싸움 전문 정권으로 묶어놓는 족쇄가 돼 버렸다. '과도한 꿈'을 실현할 수 없는 핑계거리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싸워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 정권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레드오션'의 짜릿한 경험이다. 마약인들 그런 황홀한 경험을 줄 수 있었을까? 47석에서 152석으로, 여당 의석 수를 3배 이상 뻥튀기해 준 4·15 총선의 감격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자신들에 대한 적대자들이 비참하게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르가슴' 비슷한 걸 느끼진 않았을까?

만약에 노 정권이 처음부터 '블루오션' 전략으로 갔다고 가정해보자. 정파간 차이를 최소화하면서 모든 정치적 역량을 민생에 집중시키게끔 국정운영을 해나갔다고 가정해보자. 오르가슴? 짜릿한 경험?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열성 지지자들조차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노 정권은 "아, 꿈이여 다시 한번!"을 주문처럼 되뇌이고 있다. 장관 자리마저 내년 지방선거용으로 이용할 정도로 '레드오션'을 위한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선거의, 선거에 의한, 선거를 위한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노 정권 자신도 기꺼이 인정하겠지만, 노 정권은 '올인 정권', 아니 우리말로 '다걸기 정권'이다. 그래서 싸움에 능하다. 문제는 승리 이후다. '승자의 재앙'이 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노 정권은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만 주된 의미를 둘 뿐 이기고 나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프로그램이 없거나 약하다.

그런데 그 책임을 노 정권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답해보자. 한국은 '레드오션'을 요구하는 사회다. 무슨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는가 살펴보라. 피를 부르기 위해 안달하는 식으로 보도하고 논평한다. 별 일이 아닌데도 누구에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누구에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는 식의 황당한 해설이 난무한다. 언론만 그러나? 아니다.

정치는 국민오락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모든 실권은 경제로 넘어갔다. 검찰이 돈 먹은 거물 정치인들을 줄줄이 잡아넣자 검찰 팬클럽까지 생겼다. 그러나 그 검찰이 재벌 앞에서 왜소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 팬클럽은 모른 척한다. 그 팬클럽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든 관심과 분노를 정치에만 집중시키게끔 유도되고 있으며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다.

모든 실권이 경제로 넘어갔기 때문에 정치가 아무리 개판 쳐도 한국사회는 끄떡없나? 그렇진 않다. 정치는 비생산적일 망정 가공할 파괴력은 갖고 있다. 그래서 승자의 재앙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선거에서의 승리지상주의는 피에 굶주린 유권자들이 있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유권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지상주의를 혐오하면 누가 감히 '레드오션'에만 집착하겠는가? 승자에게 무조건 박수를 보내지 말자. 먼저 어떻게 이겼는가를 살펴보자. 모든 국민과 정치권이 '승자의 재앙'을 두렵게 생각할 때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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