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타인의 고통

당대의 대중문화 비평가인 수전 손택은 근간 '타인의 고통'(2003)에서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은 결국 같은 것이다."

알 카에다가 테러를 할 때는 먼저 언론에서 가장 극적으로 보도될 시기와 장소를 택한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 정부든 일상적인 정책 하나를 발표하더라도 텔레비전 뉴스시간을 의식한다.

결국 정치나 전쟁은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남에게 보이는 나'를 만들어가려는 영웅들의 욕망이 동인으로 작동한 결과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런 이미지를 보는 것일까.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고? 사건들을 일으킨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아니면 이런 끔찍한 사진들을 보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공범의식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을 더 쉽게, 더 빨리 본다는 것이 우리가 그 피사체들의 고통을 더 생생히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관객의 입장에서 현실은 스펙터클이다.

그러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시각 이미지의 피사체로 남겨진 저 시체들, 저 부상자들, 저 고아들에게 현실은 현실이다. 그들이 피사체로 선정되는 순간, 그들은 제2의 테러를 당하는 것이다.

사진술 발달 이후 유명한 기록사진 작가들의 활동 무대는 대개 아시아나 아프리카였다.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매체의 독점 현상이 사라지나 했더니 이제 잔혹 영상의 무대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옮아가는 추세이다.

이미지가 아픔을 호소하는 수단이 아니라 정치, 전쟁, 이념집단의 홍보수단이 된 지금, 이미지를 본다는 것이 남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스펙터클로 된 지금,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수전 손택의 메시지는 공허하게 울린다.

박일우 계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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