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하 조선인들은 문화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야 했다. 근거 없는 이런 차별 뒤에는 비이성적인 멸시가 있었고, 그 멸시 배후에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이나 '시민'이라 불릴 만한 식민지의 상위계층 사람들도 쉽게 고등계 형사나 검사들에게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폭력 앞에서 쉽게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댔다. 폭력은 일상인의 몸에 구현되는 식민지 파시즘의 일상적인 구현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1926년과 1936년은 유난히도 '민족 신드롬'이란 두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1926년에는 순종 인산일을 기점으로 자본의 힘과 자생적 이념, 근대적 미디어와 전근대적 인간 네트워크가 서로 상승 작용해 장대한 사회적 스펙터클과 민족주의적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한반도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손기정 신드롬의 배후에는 순종 인산 때부터 준비되고 훈련된 민족주의적인 관중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상업적 미디어, 그리고 자본의 논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영웅·의례·표상이 어우러져 민족주의적 대중사회를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오늘날의 국가주의적 스포츠 열기와 독도 등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민족주의적 열기와 움직임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신드롬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스포츠는 근대성의 한 표현 양식이다. 우리를 타인(서구 선진국)에게 내보이고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계기이자 민족 실력의 척도였다. 한국의 스포츠민족주의는 1890년대부터 주조되고 1920년대에 온전한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기 스포츠는 국가와 황제에게 바치는 충성 그 자체였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체육회를 결성해 조선 근대 스포츠의 발전에 한 몫을 담당했다. 전국에서 각종 운동회가 개최되고 운동장에서 조선인들은 '상상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조선인의 스포츠는 일본인들에 의해 육성되거나 그들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열등감에 기초한 조선인의 집단적 무의식은 스포츠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러다가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순간 그 열등감은 우월감으로 환치되었고, 거지건 백정이건 양반이건 모두 자랑스러운 조선 '민족'이 되었다.
'끝나지 않는 신드롬'(푸른역사)은 '근대의 책 읽기'로 문학연구의 지평을 넓힌 천정환씨가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대중적 신드롬에 주목한 책이다.
'순종 인산'과 '일장기 말소사건'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을 축으로 조선인들이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거느린 심성과 표상, 그리고 그 작동 방식을 고찰한 연구 성과이다.
저자는 특히 신드롬의 진원지이기도 하며 조선의 근대성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20세기 초의 스포츠를 매개로 삼아 식민지시대 민족주의를 살폈다. 스포츠는 근대 양식의 한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기사와 회고록 등을 토대로 당시 사건을 충실히 반영하되 소설적 기법을 사용한 생동감 있는 묘사와 군더더기 없는 시원한 문체로 그때 그날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적인 책으로서의 재미와 유익, 역사서적으로서의 교양과 지식을 두루 갖춘 색다른 역사서로 읽힌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