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이슬 머금은 새빨간 동백꽃이

바람도 없는 어두운 밤중

그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깊은 강물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서정주(1915~2000) '삼경'(三更)

바람도 없는 깊은 밤중에 이슬 머금은 새빨간 동백꽃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득한 높이에서 한없는 깊이로 추락하는 존재자의 비극적인 모습이 두렵도록 아름답습니다. 시인은 섣부른 예측이나 감상을 노출하지 않고 추락의 이미지만 제시할 뿐입니다. 고요와 어둠, 벼랑이라는 수직의 절벽, 깊게 흐르는 강물, 소리 없이 떨어지는 중심 이미지로서의 새빨간 동백꽃….

이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비극적 정황 속에서, 갑자기 뼈가 저리는 고독과 소멸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잊고 있던 존재망각에서 깨어나 자신의 실존과 조우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진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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