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느림보족

고도 성장 시절, 우리는 잘살아보자며 분(分)'초(秒)를 아끼며 땀을 흘렸다. 이 같은 압축 성장 시절 생활 자세는 '빨리빨리'라는 유산을 남겼다. 한때는 최고의 생활가치였던 그 유산이 이젠 사회 곳곳에서 홀대받고 있다. 삶의 여유를 찾자는 움직임 때문이다. 빨리빨리가 차지했던 자리에 느림의 문화가 스며들고 있다. 사회적 지위나 수입에 매달리지 않고 삶을 즐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 속도의 노예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일어났다. 1989년 프랑스에서 채택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선언문은 "패스트 푸드를 강요하는 빠른 생활의 바이러스가 우리를 굴복시키고 있다"며 속도의 노예에서 탈출하자고 한다. 속도 경쟁을 그만두는 대신 생활의 여유를 찾자는 선언이었다. 1990년대 미국서 등장한 슬로비(slobbie)족은 물질보다 마음, 출세보다 가정생활을 중시한다. 사회생활의 브레이크를 밟자는 스카이버(skiver)족도 같은 부류다.

◇ 최근 들어서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도 나타났다. 다운시프트는 저속기어로 바꾼다는 자동차 용어로 경쟁과 성장 대신 여유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말한다. 일보다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일명 '느림보족'으로 불린다. 다운시프트 움직임이 활발한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노동자의 상당수가 느림보족으로 변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태 전 느린문화학교가 문을 열기도 했다.

◇ 미래 예측 모임인 세계미래학회가 18일 오늘 태어난 아이가 25세가 되는 2030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를 예측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 공상과학소설가 아서 클라크 등이 소속된 미래학회는 느림보족이 지구촌 곳곳에서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돈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는 대신 영적 풍요로움과 가족과의 시간을 중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예측이다.

◇ 느림의 문화를 강조하는 이들은 빠름에 적응 못한 미숙도 아니라고 한다. 자신을 뒤돌아보는 생활의 여유라고 한다. 옛 선비들이 벼슬 자리가 높아지면 집의 칸수와 반찬 한 가지를 줄이며 한 해 걸러 옷을 지어 입은 것도 빨라지는 인생에 저항을 준 것이라는 글은 되씹어 볼 만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운시프트가 되면 이 세상은 누가 먹여 살릴까.

서영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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