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李太洙 칼럼-빠르게, 한편으론 느리게

'먼저, 더 많이' 가치관 부작용 / 결과와 과정 '조화·균형' 필요

사람들은 요즘 살아가는 게 힘이 든다고 한다.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살아남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도 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바쁘게, 쫓기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황금만능(黃金萬能)'의 세상에 내던져진 채,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이익을 찾아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얻고 있는 건 무언가. '부익부 빈익빈'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가운데 한결같이 불만이 커지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잘살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는 얻는 게 적다는 얘기가 아닐는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무한경쟁에 따르는 스트레스가 무거워지는 것은, 간디가 '지구의 자원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충분하지만 인간의 욕심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듯이, 우리 사회가 끝없이 부추기는 '욕망 키우기'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권만 하더라도 빈 수레처럼 '빨리 빨리' 소리만 높여가고 있다.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사안마다 지지부진하거나 방향감각마저 아리송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민생(民生)'과 '경제'는 구두선(口頭禪)에 묻히고, 이기주의를 내세운 대립과 갈등만 증폭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개혁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는 하지만, 청와대건 정당이나 국회건 무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무얼 기대해야 할지. 종잡기가 어렵다.

세계화와 디지털로 상징되는 현대의 코드는 분명 '속도'다. 그러나 '빨리 빨리'라는 삶의 패턴이 확산되고 있는 한편으로는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오' 등 취업난과 직장 퇴출을 일컫는 신조어들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 '스트레스 사회'가 여전해 우리를 우울한 늪에 빠뜨린다.

옛날 우리나라를 일컫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동이열전(東夷列傳)'에 기록돼 있다.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은 여기에 우리나라를 '풍속이 순후해서 길을 갈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서로 양보하는 예의 바른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썼다. 또한 구한말에는 '은자(隱者)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점차 변화와 마주치고,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졌다. 불과 30여 년 만에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졌다. 그 이후 우리의 전통적 미덕인 '은근과 끈기'는 '빨리 빨리'로, '양보와 예의 바름'은 '남보다 먼저, 더 많이'로 바뀌어 날로 속도가 붙어 왔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미 2000년대 들머리에서 우리나라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정보 혁명 발전 속도 역시 마찬가지라 했다. 우리는 그만큼 '빨리 빨리' 가고 있으며,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감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빨리 빨리'는 부작용과 폐해도 더욱 키웠다. '빠름의 미학'에 기운 나머지 밀란 쿤데라가 말한 바 그 '느림이 감속의 기법을 다룰 줄 아는 지혜'를 놓쳐 온 형국이다. 그래서 어둠과 그림자가 더 짙어지고 있다.

'느림'을 '게으름'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는 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창조적인 게으름'이라 해야 옳다. 특히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피에르 상소의 견해대로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므로 소중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그 방식을 너무 도외시해 온 것 같다.

'느림의 미학'은 더구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므로 '결과 집착과 과정 소홀'을 면하기 어려운 '빠름의 미학'에만 기울어져 놓친 게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 큰 잘못은 '가치관의 흔들림'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신문화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물질적 풍요와 이기적 욕망 추구'에 밀려나 버린 '뒤집힌 가치관'도 '느림의 미학' 실종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빠르게'와 함께 '한편으로는 느리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속도가 곧 경쟁력'인 이 디지털 시대에 과정만 중시하면서 느리게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섞이고,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도 보다 살맛나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느리게'가 갖는 미덕을 최대한 살린 '빠르게' 미학의 새로운 추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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