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설움, 오늘에야 얘기하네. 내 평생 굽이굽이 쌓인 한이 깨끗이 풀어지는 것 같아."
"저도 이런 자리는 처음이예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아니겠어요."
22일 오후 KBS대구방송총국 전시실에서는 특별한 사진전이 열렸다. '어제와 오늘-한국민중 80인의 사진첩' 전시회. 전시회를 둘러보던 70~80대 평범한 노인들이 못다한 이야기가 있는 듯 둘러 앉았다. 평소 같으면 전시회 구경이나 할 법한 사람들이지만 이날 만큼은 주인공이었다. 20세기를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노인들은 하나같이 "내 얘기를 들어주니 고맙지"라며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바빴다.
이날 보통사람들의 빛바래고 낡은 옛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함께 전시하는 자리에는 대구·경북지역에 거주하는 사진 속 주인공 7명이 직접 첨석해 감회를 털어놨다.
박장권(84·대구 달서구 두류2동)옹은 일제시대때 유행어 '묻지말자 갑자생'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박씨는 "갑자(甲子)생들이 스무살이었을 때 죄다 일제에 끌려갔어. 그래서 '묻지말자 갑자생'이란 말이 생겨났지. 두 살 어린 나를 강제징용하려고 해 경산으로 도망갔는데, 그 후 석달만에 해방됐어. 구사일생이었지"라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그러자 조상점(76·경남 마산시 신포동) 할머니도 "시집 가지않은 처녀들은 일본군이 무조건 잡아가니까 무조건 짝맞춰 결혼할 수 밖에 없었어. 나는 18살에 결혼했는데, 그때 잡혀간 내 친구들은 모두 다 죽었다"고 말했다.
또 어려웠던 젊은 시절을 넋두리처럼 들려주는 이도 있었다. 서상호(87·포항시 남구 구룡포읍)옹은 "같은 마을 일본인 집에서 라디오를 처음 봤어. 그때 그 라디오가 어찌나 신기하던지, 마을 사람들이 그집 현관에 진을 치고 라디오 연속극을 들었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추태선(76·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할머니는 "옛날엔 몸에 맞는 옷은 상상도 못했어. 훨씬 큰 옷을 사서 한 3년간 입다 보면 그제서야 몸에 맞는데, 그땐 이미 헤져서 입을 수 없게 돼"라며 웃었다.
이날 전시회에는 채록 기간 중 고인이 된 사람들의 유족들도 참가해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번 사진전은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단장 박현수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 지난 3년간 연구성과를 일단락하는 자리. 연구단은 '민중을 주인공으로 근현대사 다시쓰기'의 하나로 전국에서 99명이 참여해 2002년부터 보통사람 80명의 삶을 채록하고 사진을 찍어 민중의 삶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해왔다.
연구단 임경희 영남대 교수는 "민중들이 실제 역사의 주역들이었지만 기록되지 못해 역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면서 "지금 당장 조사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될 민중들의 기억을 통해 근현대사를 새로 쓰는 작업인 만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한편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은 이번 전시에 선보인 사진작품과 채록자들의 글 등을 엮은 사진첩 '어제와 오늘'을 펴낸데 이어 이들 80인 중 20인을 선정, 구술한 이야기를 '20인의 구술자서전'을 단행본(20권)으로 10월부터 차례로 발간할 예정이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사진 : 20세기를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삶과 사진을 채록, 한국민중의 역사를 기록하는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작업에 참여했던 주인공들이 22일 KBS대구총국 전시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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