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다 보니 산자락 아래다 나만의 공간을 하나 갖게 되었다.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집필실이지 콧구멍만한 게 그나마 낡아빠져 볼품이 없지만, 그래도 가벼운 기분으로 산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일찌감치 저녁을 끝낸 뒤면 간편한 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소요를 나서곤 한다.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은행나무가 도열하듯 무리를 이루어 서 있다. 그러니 싫든 좋든 이 은행나무들과 마주치게 된다. 줄잡아 천여 그루는 될 성싶다. 개중에 큰 놈은 한 아름이 넉넉한 것도 더러 눈에 뜨인다. 죽죽 근심 없이 자란 은행나무가 보는 사람의 눈에는 탐스럽기까지 하다. 아기의 조막손을 닮은 수만 개의 잎사귀들이 황금빛 햇살을 쉴 새 없이 초록물감으로 바꾸고 있다. 한 움큼 따서 꽉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들을 것만 같다. 그 잎사귀들에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마음까지 말갛게 헹궈지는 느낌이 든다.
일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허리를 구부려 부지런히 잡풀을 뽑아내고 있다. 두 부부의 뒷모습이 퍽이나 다정스러워 보인다. 마치 은행나무 숲에 깃든 한 쌍의 두루미 같다. 이런 정경이 산책객의 눈에는 그저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등 너머로 치사(致辭)의 말을 건넨다.
"훌륭히 키운 자식들을 보듯 참 뿌듯하시겠습니다."
내가 던지는 인사말에 주인 내외는 굽혔던 허리를 반쯤 펴면서 한숨부터 짓는다.
"말도 마시오, 원~. 송아지라도 되었으면 키울수록 돈이나 되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대답이다. 당초 가로수용으로 키워 시장에 낼 요량으로 심었던 나무였는데, 팔리지 않은 채 몸피만 굵어져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단다. 푸념을 늘어놓는 노인네의 옆모습이 금세 측은한 분위기로 바뀌고, 황혼 빛에 물든 쓸쓸한 표정에는 짙은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나이테가 너무 감겨 출하시기를 놓쳐 버린 이 은행나무의 사연을 들으면서, 불현듯 혼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시집을 가지 않는 주위의 수다한 노처녀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인 일일까. 그네들이야 자신이 좋아서 한 선택일지 모르겠으되 부모는 까맣게 속이 탄다. 남들은 잘도 외손자 외손녀를 쑥쑥 보건만, 자신은 대체 뭐가 모자라 이래야 하는가 하며 신세를 한탄한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둘이 아니다. 요사이 들어 한사코 시집을 가지 않으려는 과년한 딸자식을 둔 늙은 부모들의 답답해하는 사연을 심심찮게 만난다.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 만나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살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심정을 그들은 헤아리지 못하는가 보다. 딸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나무를 출하시키지 못한 노부부의 마음보다 몇 갑절 더 절실할는지 모른다. 나무는 자유의지가 없어 받아줄 곳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떠나보낼 수 있었을 것임에 반해, 딸자식은 자유의지가 강해 아무리 받아줄 곳이 있다 한들 부모 뜻대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은행나무는 곁에 짝이 있어 그나마 열매라도 맺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제 분신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노처녀들, 제법 반반한 직장에서라면 이처럼 홀몸으로 늙어가는 독신주의 여성들이 발걸음에 차이듯 흔하단다. 결혼이란 것에 대해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애초 시집을 갈 생각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효니 불효니 하고 들먹이는 일이 시대착오적인지는 모르겠으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의 윤리라는 것은 엄연히 있게 마련이다. 손자를 무릎 위에다 앉혀놓고 재롱떠는 모습 보고 싶은 소박한 바람 갖지 아니한 부모 있을까. 이건 어쩌면 머잖아 소멸해가는 생명이 지니게 되는 하나의 본능이라 해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혼기가 찬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서 2세를 생산해 부모의 품에 안겨드리는 것이야말로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커다란 효도일 수 있으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노처녀로 늙는 것도 적잖은 불효인 셈이다.
곽흥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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