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일삼아 살아온 지 이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스승의 날을 지나오면서 지금까지도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다. 대학강사 첫 해에 받은 것인데, 그것은 한 다스의 연필을 깎아, 가지런히 모아 빨간 리본으로 묶은 것이었다. 그 때 그 풋풋했던 나무 냄새며 어줍잖게 내밀던 그 학생의 모습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한 번씩 일상의 지루함에 비켜서서, 지난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기억되곤 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북북'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두툼한 심지의 연필 느낌이 좋다.
선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또 있다. 우리 아이들의 유치원 시절, 어버이날이면 유치원에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들고 골목부터 시끄럽도록 뛰어오던 아이들. 종이카네이션에다 선물까지 주었다. 그것은 '사랑의 쿠폰'이었다. A4용지를 네 번 접어 만든 16개의 칸마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엄마에게 뽀뽀하기', '아빠에게 안마 100번', '할머니께 전화 드리기', '심부름하기'... 이렇게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뒷장에는 재미있게도 유효기간까지 써서... 우리는 그 '사랑의 쿠폰'을 필요할 때마다 한 장씩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그 옛날 제자로부터 받은 한 다스의 연필이나 아이들에게 받은 이 '사랑의 쿠폰'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징표를 선물받은 까닭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관심을 알고, 또 그 사람의 필요를 눈치채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요즈음 21세기에 살아남을 전략을 다룬 많은 책들이 부쩍 눈에 띈다. 한 권 찾아 읽다가 끝을 못내고 말았다. 로봇의 등장에다 가정의 위기, 해체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나의 정서와는 맞지가 않는다. 나는 우리와 다음 세대에도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비법이 좀 더 인간적이면 좋겠다. 그 때에도 선생님께 연필을 선물하고, 아이들이 '할머니께 전화드리는 것'이 그들의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일임을 알고 자라는, 그렇게 살갑게 사는 세상이면 좋겠다.
하루일이 끝날 무렵, 먼저 양치질을 끝낸 나는 가지런히 놓여진 남편과 아이들의 칫솔에 치약을 짜둔다. 우리들의 사랑법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대단한 비법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상경 오르가니스트·공간울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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