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청 폭로, '먼지 털기' 인가

터키의 술탄(왕)들이 거주했던 성(城)안에는 돌조각으로 된 수도꼭지가 많다.

주로 술탄의 회의실이나 집무실 바깥 주변에 군데군데 설치된 수도꼭지에서는 계속 물이 흘러 떨어진다.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게 아니라 도청을 막기 위한 지혜였다.

회의실 바깥에서 술탄의 대화 내용을 들으려 가까이 접근해도 흐르는 수도 물소리 때문에 안쪽의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일본의 황궁에도 마루 구조를 특수하게 설계하여 아무리 발꿈치를 들고 소리 죽여 접근해도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자객이나 몰래 엿듣는 도청을 막았다.

어느 시대 어떤 권력자든 권력을 쥔 쪽은 정권 유지와 자기보호를 위해 끊임없이 정적의 도청에 대한 방어 속성을 지녔던 셈이다. 나의 비밀이 도청당하는 걸 두려워하는 권력자들의 심리에는 남의 비밀은 몰래 엿듣고 싶어하는 이중성도 잠재된다.

MBC 방송의 국정원 도청 테이프 공개 보도로 정가와 언론계에 번지고 있는 파문을 보면 권력의 이중성과 함께 세상이 막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솔직히 정'재계 고위층과 기관장, 언론계 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도청 얘기는 요란스런 사건이 못 된다. 정'관계에서 도청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상식'이었을 뿐이다.

웬만한 기관장이면 휴대전화기를 두 개 지니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도 개인 보안용은 수시로 번호를 바꿔 버린다. 도청 할 거라는 불신을 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감청이 안 된다는 국정원 얘기 같은 건 아예 믿지 않는다.

대구에도 고급식당이나 기관장 등 모임이 잦은 업소에는 도청이 된다는 얘기가 수년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았다. 신임 기관장이 부임해 오면 먼저 부임한 다른 기관장이 '귀띔'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도청이 이렇게 돼 버리면 제대로 들어볼 만한 '건수'는 들을 수가 없다. 아무도 바보같이 도청 당하는 식당에 앉아 '입초사' 오를 헛말을 할 리 없는 것이다. 서로서로 쉬쉬하는 기분 나쁜 불신만 잔뜩 쌓이고 도청 효과도 없게 되면 그런 짓거리는 국가나 지역사회의 건강한 커뮤니케이션 소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더구나 이번 도청 폭로는 폭로자가 국가공직자, 그것도 국가정보를 관리했던 안기부 직원이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공공연히 폭로했다는 점에서 도대체 이런 국가정보기관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실망을 떨칠 수 없다. 정치자금 폭로가 깨끗한 정치 개혁을 위한 정의라고 생각했다면 부도덕한 명령을 내린 권력이 눈뜨고 살아 있을 시대에 폭로했어야 했다. 그것이 용기요 정의라면 정의다.

왜 어느 날 갑자기 케케묵은 낡은 도청 테이프를 꺼내 먼지를 털어대고 있는가. 멋지거나 정의로워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떳떳해 보이지도 않으며 당당하거나 순수해 보이지도 않는 모양새로 국내외적으로 나라 체면만 흐리게 하는 폭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사업하고 돈 벌어야 하는 경제인 쪽이 권력 쪽에서 정치자금 달라고 손 벌리고 나오는데 간 크게 '노!'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라면 도청하고 폭로하는 쪽이나 돈 바치고 이권 유착하는 거나 오십보백보다. 전직 안기부 직원은 이번 도청 테이프 말고도 더 큰 것들도 많다는 말로 필요하다면 먼지털기가 훨씬 더 오래 계속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도청과 방어, 폭로와 상호 불신의 갈등, 여'야의 정치성 시비로 나라 안이 자욱해질 '먼지털기' 게임은 분명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정치 게임이 될 것이다.

도청 폭로로 과거를 털어내는 일 못잖게 불법 도청의 부도덕함과 국가 정보를 세계에 까발리고 나라 망신시키는 행위를 더 크게 꾸짖는 지도자의 고함은 왠지 들리지 않는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