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구아나 키우는 윤옥순씨네

지난 주말 저녁 화원의 한 아파트. 윤옥순(50·여·달성군 화원읍)씨가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환희를 부른다. 반갑게 짖어대는 깡순이(애완견 이름)의 구애까지 무시하고 윤씨가 찾는 환희는? 거실 구석에서 길죽한 몸을 늘어뜨린 채 팔자 좋게 자는 이구아나다.

인기척에 부스스 눈을 뜨는 환희는 뷰렛을 쓰다듬는 윤씨의 무릎 위로 슬그머니 기어오른다. 딸 정수진(22)씨와 아들 동규(15)군도 어느새 환희 곁에 와서 장난을 친다. 겁까지 슬슬 나는 녀석이 뭐가 그리 예쁜지 모두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

윤씨는 "요 녀석이 보기는 이래도 얼마나 애교덩어리인데요. 무뚝뚝한 아들보다 훨씬 낫죠"라며 환희를 끌어안는다. 아들 정군은 "요 녀석이 인기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5년 전부터 기르던 깡순이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어요"라며 좀 머쓱한 표정이다.

1년 전 동규가 환희를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할 일. 윤씨는 아들과의 약속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환희를 키우게 됐다. 계속 이구아나를 키우겠다며 조르는 동규에게 윤씨는 학교 성적을 채찍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웬걸. 중하위권이던 동규가 당당하게 반에서 5등을 한 것. 마지못해 이구아나와 동거를 하게 된 윤씨. 그래도 처음 두 달쯤은 겁이 나서 아예 근처에도 못 갈 정도로 파충류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집에만 들어오면 왠지 찜찜했다"는 윤씨.

"이 녀석이 내가 잘 때면 한 번씩 슬며시 옆에서 자더라고요. 어느날은 배 위로 올라오기도 하고요." 환희의 뻔뻔스런 행동이 조금씩 사랑스러워 보였다. 한번은 동규가 짓궂게 장난을 치다가 물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요 녀석은 머리가 영특한 모양이에요. 잘못했다는 걸 아는지 석고대죄하듯 몸을 구부리고 가만히 있더라고요. 당장 버리고 싶을 만큼 분하다가도 이내 웃음이 나왔어요." 딸 정씨의 말이다.

특이한 놈을 키우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심심찮게 생긴다. 이전에 살던 주택 옥상에서 환희가 일광욕을 한답시고 지붕을 돌아다니다 행인들이 "공룡이 나타났다"라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지난해 12월 이사할 때의 일도 환희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책상 밑에 있는 환희를 모형으로 착각하고 만지려다 꼼짝거리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뒤집힌 적도 있다.

환희는 이제 이들 가족에겐 없어서는 안 될 분위기 메이커다. 2001년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 뒤 왠지 침울하던 가족 분위기가 이 녀석 하나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예전엔 그저 집에 돌아오면 각자 방으로 직행하던 가족들이 지금은 환희 재롱을 보려고 거실에 빙 둘러앉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자연스레 가족간의 대화도 이어진다고. "대체로 환희에 대한 이야기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웃을 일도 생기고 서로서로 일에 대해서도 묻게 되고요." 딸 정씨는 환희를 통해 가족끼리 공감대가 생긴다고 한다. 특히 윤씨는 몰라보게 표정이 밝아졌다. "예전엔 비가 오면 너무 쓸쓸해서 많이 울었는데 재롱을 부리는 환희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졌어요. 이젠 뭔가 빈자리가 메워지는 것 같아요."

동규는 "이구아나는 키우긴 조금 어려워도 외로움을 덜 타서 사람을 귀찮게 안 하고 웬만한 사람보다 깨끗해요. 무엇보다 뭔가 특별한 것을 키운다는 느낌이 들잖아요"라며 환희 예찬론을 편다.

전창훈기자 apolonj@imaeil.com

사진 : 윤씨 가족이 거실에 모여 환희에게 가장 좋아한다는 호박을 먹이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