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와글와글] 방송의 책임과 역활

최불암 김상순 하면 지금은 모두 환갑이 훨씬 넘은 원로연기자들입니다. 3년전 세상을 떠난 비운의 남성훈까지 포함해 이들이 한창 날리던 30~40대시절에 출연하던 MBC TV '수사반장'이란 사건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겐 참 인기캡이었습니다. 당시엔 유명한 코미디프로 '웃으면 복이와요'까지 일요일밤이면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그걸 보는 재미로 일주일을 기다릴 정도였으니까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증거를 포착하고, 박진감 넘치는 활극을 벌여 범인들을 붙잡는 짜릿한 재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무렵 '수사반장'의 주인공들은 그 자체만으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포함한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범죄집단의 폭력성까지 잠재적으로 전파시킨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를 수 밖에요. 심각성을 어디 감지나 했겠습니까. 사건현장에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면 장갑을 끼어야 한다든지 흉기를 사용하면 증거를 없애려고 저수지나 하수구에 버린다든지 하는 알고보면 TV가 범죄기술까지도 상세히 가르친 셈입니다.

요즘 방송이 거의 미쳐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뺨을 얻어맞고, 아들한테 보상을 받거나 위로를 받기는 커녕 되레 핀잔을 받는 일이 드라마로 방영되더니 생방송 음악프로그램에선 남성출연자들이 발가벗고 성기를 노출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부모에게 하는 말투를 보면 그 가정의 분위기를 금방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다 TV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요즘엔 아빠나 엄마한테 막말하거나 주먹질을 해대는 일도 허다한데요. 왜 그럴까요. 가정마다 각기 다른 환경 탓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성향은 결국 TV 드라마나 코미디같은 데서 보고 배우는 것이지요.

아무리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할 윤리라는게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패는 일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욕설하고 폭력을 휘두른 것과 하등 다를게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런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일이 버젖이 TV로 방영까지 됐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신세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비일상적이고 파격적인 행동도 따지고 보면 TV에서 받은 영향력이라고 저는 봅니다. 청소년들은 컴퓨터 게임에 빠지면 잠은 커녕 밥도 안먹고 매달리기 마련입니다. 자기 통제력이 부족한 그 나이 때의 시청자들에겐 어쩔수 없는 일이라구요? 그래서 TV란 공공매체의 역할과 책임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TV가 무책임하게 양산하는 극약처방에만 익숙하다보니 웬만한 것엔 싫증이 나 있습니다. 뭔가 톡쏘는 재미가 아니면 아예 흥미를 갖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도 결국 TV의 책임입니다. 같은 뉴스와 정보를 얻더라도 신문과는 그 달라지는 속성은 천양지차입니다.

TV 생방송중 알누드로 성기까지 내보인 인디밴드그룹 멤버는 사실 TV에서 길들여진 부정적 성향이 그대로 반영돼 노출됐다고 봅니다. 파격적인 재미와 호기심을 발동하려는 잠재적 충동이 폭발한 것이란 얘기지요. 벗은 자(?)나 그걸 즐기려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악순환의 누적이지요.

엊그제 피서지 밤 풍경을 다룬 KBS 2TV 'VJ특공대'도 같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TV가 도를 넘어 탈선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내보냄으로써 예비탈선 청소년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판단이 됐습니다. 술에 취해 도로가에 쓰러져 있거나 몸싸움을 하고, "맘에 맞으면 여관에서 논다"는 즉석 애정행각까지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할 10대 모습이라고 보기엔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피서지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이 물론 처음 있는 건 아니지만 TV로 여과없이 방영될땐 차원이 다릅니다. 현실을 무시하자는게 아니라 TV가 단지 시청률에 급급해 선정적으로 보여줄게 아니라 계도차원에서 거르고 걸러야 한다고 봅니다. 휴가철마다 반복되는 TV의 무책임한 방송행태가 왜 계속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 '수사반장' 얘기를 했습니다만, 시청자들은 TV를 보면서 단지 즐길 뿐입니다. 그건 어른이고 청소년이고 어린아이들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웃기는 코미디를 보고 배꼽을 빼면서 "어허, 저거 심각하네굩" 하고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냥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빠져들고 매몰될 뿐입니다. TV란 원래 속성이 그런거니까요. 오죽하면 바보상자라고 하겠습니까.

세끼 양식을 구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삶의 질이 달라지면 물질적 풍요 못지않게 관습과 도덕 윤리 같은 정신적 문화적 가치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TV가 과연 얼마나 그 역할에 자기본분을 한다고 믿습니까? 혹시 그 정반대의 부정적 임무(?)에 골몰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스포츠조선 온라인뉴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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